필사적으로
상태바
필사적으로
  • 박하현 시인·시집 김포등대
  • 승인 2019.07.04 17: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하현 시인·시집 김포등대

출간 준비를 하면서 작품을 매만지던 중이었다. 그동안 지면에 발표해 얼굴 드러낸 시를 다시 읽는데 그만 손으로 가리고 싶어졌다. 참혹한 심정으로 컴퓨터 자판 위 손톱 밑이 까매진 두 손을 가만히 살폈다. 머위를 다듬었던 손, 김치를 썰었던 손, 잡초를 뽑고 모종의 떡잎을 따준 손끝에는 온갖 냄새와 물이 배어 있었다. 이제껏 거절 한 번 못하고 받아들이기만 한 손, 그 손을 위로하듯 여행 가방을 쌌다.

이미 다녀와 겹친 곳을 제외하고 버스 이동이 많은 곳을 피해 정한 여행지는 북스페인에서 남프랑스를 거쳐 북이탈리아를 지나는 여정이었다. 작고 아름다운 나라들, 미소국 여행이라면 어쩐지 이름처럼 미소 지을 것도 같았다. 지친 몸을 다스리며 라르고의 여행을 목표로 하면서도 시집 한 권과 편집 중인 원고의 반을 덜어 가방에 넣었다. 집에서부터 도착지까지의 긴 비행은 먼저 나 자신을 버리라는 충고부터 한다. 간신히 몸을 추슬러 여행에 적응하느라 사흘은 책 한 페이지 넘기지 못했다. 낯선 이들과의 동행에 애써 무심하려 했지만 그들의 언행에 몇 몇 부적응이 따라 불편하기도 했다. 열흘 넘게 같은 시간 한 공간을 드나들어야 하는 처지이고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여야 한다는 답을 얻었지만 행동에 다 옮기지는 못해 성숙한 사람의 한계에 부딪치곤 했다. 서로를 위해야 하는 여행에서 잠깐 내 시간을 갖는 일이 실례 같았지만 좋은 컨디션일 때는 뒷좌석으로 가 ‘기억의 못갖춘마디’를 펼쳤다. 대시인의 글썽이게 하는 구절 앞에 중언부언 완성도 떨어지는 나의 시들은 시답잖을 뿐이었다. 쿵 내려앉는 마음을 안일했구나 반성하는 시간으로 대체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선가 주어지기도 했다.

그 힘에 기대어 원고 수정은 완전한 몰입 없이는 접기로 했다. 그렇게 여행에 충실하려 했지만 장시간 버스 이동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알지 못하는 가사를 웅얼거리며 팝송에 묻어가기도 하고 영화로 달래기도 했다. 모나코에서 나와 친퀘테레 마을로 가는 역, 돌담에 핀 야생화를 바라보다가 문득 ‘당신은 오지 않으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가사의 ‘당신’ 부분에서 왠지 슬퍼지기도 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다시 오른 버스,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와 그녀의 멘토 타커 신부의 대화를 듣는다. 세계적인 배우에서 실패하지 않는 왕비로의 전환을 결정하는 그녀를 응원하는중, 예전의 울음 여행에서 깊음 여행으로 전환하는 내게도 더불어 응원을 보냈다. 그때문인지 간헐적인 다리 통증과 문득문득 찾아오던 멀미가 가라앉고 있었다. 타커 신부가 본국으로 떠나게 된 소식을 듣고 찾아간 그레이스는, 이국에서 국모로 거듭나야 하는 난관 앞에 ‘혼자 해내셔야 합니다’는 충고를 들으며 흐느낀다. 그녀는 낭떠러지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제 2시집 출간 저자로서 나도 ‘혼자 해내야  합니다’를 되뇌는데, 발을 굳게 딛고 눈을 부릅떠야 할 것 같았다.

창밖으로 비안개(우연) 속 하나 둘 불 켜지는 집들이 따스하고 정겹게 다가왔다. 할 수 있다면 시집도 나도 그런 온기로 남았으면 싶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나대로 나를 키워가는 시간이었으면 되니까... 영화는 한참 당당한 아내와 엄마와 지도자가 된 그녀가 각국에서 온 귀빈 앞에서 연설을 하는 중이다. 한 배우 그녀였다 수많은 그녀가 된 그레이스... 자랑스러운 은총의 켈리를 마음에 담고 숙소에 도착했다.

집으로 오는 비행 역시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찬 음료를 마신 게 탈이 나 꼬박 굶은 채 인천에 내렸다. 누구보다 서둘러 공항버스표를 사는 나를 보며 여행의 시작에 설레는 게 아니라 여행의 마침에 설레는 나이라는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스위스를 지날 때 나무들이 막 깨나는 것을 보며 돌아왔는데 거리의 나무들은 초록의 성하를 뽐내고 있었다. 한 계절을 일찍 사는 우리들, 빠르고 위대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시집 출간은 또 어떤 속도를 타고 내달릴 것인지 자못 기대가 된다. 내려다보는 손이 그동안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 보낸 시간들이었다며, 이제 움직일 때라며 재촉하는 것도 같았다. 다시 손톱 끝에 이 물 저 물 들이는 날이 왔다. 무엇보다 여행에서 얻은, 혹은 잃은 어떤 것들로 시를 물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서두르지 않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스키 성지 여행>에서 말한 것처럼,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마음속에 남아 떠오를, 그 소중한 무엇을 기대하며 기다리려 한다. 여행 도중에 느끼지 못해도 한참이 지나 깨닫게 되는 그것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애써가며 여행 같은 걸 할 리 없다지 않은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