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죽서루와 이옥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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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죽서루와 이옥봉(1)
  • 배정옥 수필가
  • 승인 2019.07.1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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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옥 수필가

간밤에 잠을 설친 탓인지 눈도 천근 몸도 만근처럼 무겁다. 늦장을 부리던 나는 평상시보다 이른 시간 자명종 소리에 놀라 스프링처럼 몸을 튕겨 일어났다. 오늘은 향토사 회원들과 강원도 삼척 죽서루를 답사하기로 한 날이었다. 서둘러 읍사무소 광장에 도착하였다. 약속 시각 8시가 되자 일행을 실은 차는 쏜살같이 내달린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목적지인 죽서루에 도착하였다.

4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한 여인의 흔적을 찾아 다섯 시간을 달려온 나그네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죽서루에 올랐다. 아득히 어디에선가, 수런대는 소리와 양반들의 팔자 수염을 어루만지며 호탕하게 ‘껄껄껄’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삼척 ‘죽서루’는 조선 시대의 누각이다. 문화재 지정 보물 제213호이며 건립 시기는 1403년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겹처마가 팔작지붕 건물이며 삼천시의 서쪽에 흐르는 오십천을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다. 17개의 원형 기둥 위에 세워진 죽서루는 자연 암반 위에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져 있었다. 말 듣던 대로 관동팔경 중 제일 아름답지 않을까?

일행들은 자리를 옮겨 오십천 가까이에 있는 정자에서 죽서루를 감상해 보았다. 오십천에 풍덩 잠겨있던 절경의 풍광이 오롯이 살아나는 듯하였다. 삼척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오십천의 하천 경관 중에서 가장 절경을 이루는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죽서루에서 내려다보는 오십천 경관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와 절벽이 강물과 어우러진 경관은 매우 아름다웠다.

죽서루와 바로 아래 펼쳐진 오십천을 눈에 담고 보니 조선 3대 여류시인 황진이, 허난설헌과 쌍벽을 이루던 ‘이옥봉’이 생각이 났다. 그녀는 당대 여류문인으로서 충북 옥천 태생이며 옥천군수 이봉의 딸로 낭군인 조원이 삼척부사(1583년-1586년)로 부임할 때 부실로 따라와 ‘죽서루’란 절명의 시를 남긴 인연이 있다.
그녀의 절창 중 절창인 이옥봉의 오언 절구의 ‘죽서루’를 감상해보자.
     
江涵鷗夢濶(강함구몽활)
天入雁愁長(천입안수장)
 
강에 잠긴 갈매기 꿈은 넓고도 넓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도 길어라
-李玉峯(이옥봉)의「竹西褸(죽서루)」
 
이 시를 읽고 조선 중기 문신이며 영의정을 지낸 신흠(1566-1628) 같은 이는 그의 시비평집인 ‘청창연담’에서 ‘고금의 시인 중에 누구도 이에 비견될 시구를 지은 적이 없다.’라고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천고의 절창이라 거침없이 표현했다.

조선시대 남존여비 사회구조에서 동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과 이별을 아프게 노래한 여류시인 ‘옥봉’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그녀는 16세기 후반 조선 선조 왕실 종친으로서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났다. 이름은 숙원이고 ‘옥봉’은 그녀의 호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글과 시를 배웠으며 영특하고 명민하여 그녀가 지은 시는 부친을 놀라게 하였을 정도로 매우 뛰어났다. 이렇게 뛰어난 재주를 지닌 그녀지만 신분이 서녀였기 때문에 문장이 뛰어난 조원의 소실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루는 이웃의 아낙이 찾아와 자기 남편이 남의 소를 훔쳐 갔다는 누명을 쓰고 잡혀갔다고 하였다. ‘옥봉’은 남편에게 말하지 못하고 자기가 대신 시를 한 수 적어 주었다. 이 시를 읽은 형조의 관리들이 글솜씨에 감탄하여 그 남편을 석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하랴? 이 일을 안 ‘옥봉’의 남편은 관청의 일에 아녀자가 관여하여 죄인을 풀어주게 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용서하지 않고 친정집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옥봉’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죽을 때까지 남편만 그리워하다가 끝끝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본인이 쓴 시 원고를 자기 몸을 둘둘 감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훗날 그녀의 몸은 중국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시신을 싸고 있는 종이를 펼쳐본 사람들은 작품이 드러낸 그리움의 깊이에 탄복하고 그 원고를 <이옥봉 시집>으로 엮어 주었다. 이 시집은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 진에 의해 조선에 전해졌다. 그녀가 죽은 지 40년이 흐른 뒤였다고 한다. 또한 후일 남편인 조원과 조희일, 조석형 3대의 시문을 묶은 ‘가림세고’의 부록으로도 전해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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