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로운 인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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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향기로운 인연들
  • 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 승인 2019.08.2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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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세상은 이렇다. 한쪽은 흙의 은혜마저 저버린 탐욕스런 배은망덕의 손이 있는가 하면 넉넉잖은 살림에 푼푼이 모은 돈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가슴을 여는 은혜의 손길이 있다. 우리 이웃에 이런 손길이 있어 이 땅에 밝은 해가 오늘도 뜬다.

법정은 불일암을 떠나기 몇 해째 겨울철이면 산거를 떠나 나그네가 되어 있었다. 1990년 즈음 겨울에도 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고려사(송광사 분원) 개원 10주년 기념행사를 핑계로 불일암을 떠나 있었다.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명목상의 일이고. 속뜻은 그 홀가분한 날개를 지니고 싶어서였다. 사람에 지쳐 있을 무렵이라 그저 세상 구경을 하는 것이 그의 낙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곧 무척 감동적인 사람을 만난다. 그 일은 매주 금요일마다 벌어지곤 했다. 고려사 앞에는 금요일마다 청소차를 몰고 오는 청소부가 있었다.

흑인인 그 청소부는 항상 즐거운 얼굴로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무거운 쓰레기통도 번쩍 들어 차에 쏟아붓고 빈 통을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법정은 그 흑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았다. 항상 활기에 차있고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아 겉에서 보기에 성스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그가 오기를 기다려 함께 쓰레기 치우는 일을 거들었다. 흑인은 일을 도와주는 낯선 스님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서 집채처럼 커다란 차를 몰고 이웃집 쓰레기통으로 옮겨가면서 웃음 띤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법정은 ‘나무 청소부 보살’ 이라고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물론 그는 보수를 받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일을 한다. 그렇지만 봉급이나 보수는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성실한 그의 삶에 견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 일을 할 때의 그 즐거운 마음과 자신의 일에 따른 사명감과 긍지가 바로 본질적인 보상일 것이다.

강원도 오두막에 살림을 꾸렸을 때도 그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자연뿐만이 아니었다. 그때쯤 법정의 글에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일꾼이었다. 가끔 내 글에 일꾼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20리 밖에 사는 믿음성 있고 착실한 30대 젊은이다. 내가 이 오두막에 온 이듬해 봄 묵은 밭에 나무를 심기 위해 산림조합에서 묘목을 한 차 사서 싣고 와야 할 일이 있어 제재소에 문의를 했더니 한 젊은이를 소개해 주었다. 처음 전화로 사정 이야기를 했을 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믿음이 갔다. 그 일꾼은 소형트럭으로 묘목을 실어온 다음 날 나무를 심기 위해 다시 올라와 일을 하면서 법정에게 물었다. “혹 법정스님 아니 십니까?” 법정은 조금 놀랐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곳으로 왔지만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법정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스님도 참, 알겠습니다” 일꾼은 이후로 그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법정은 그에 관해 글을 써도 절대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1남 1녀의 가장인 그는 머리가 총명하여 무슨 일이든지 거의 만능이었다. 법정이 사는 오두막의 흙방을 만든 것도 그의 솜씨였다.

법정은 그를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부양가족이 있어 허리 휘도록 일을 하면서도 여가만 있으면 책을 가까이하는 중심이 잡힌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법정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내가 이 외진 오두막에 살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올라와 기꺼이 도와주는 진실한 그가 없었다면 내 오두막 살림살이는 팍팍할 뻔했다. 그를 만난 인연에 나는 안으로 늘 고마워하고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에 도움을 준다는 것은 인간의 신의와 유대를 그만큼 굳게 맺어주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시달리고 상처받은 마음은 사람에 의해 치유되었다. 법정 자신도 그것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 법정의 길에 힘을 보태고 성원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났다. 그것이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한 힘이었다. 1995년 법정은 이름도 생소한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부산이 주소지로 되어 있는 편지에서 글쓰기로 보아 달포 넉넉한 집안도 아닌 듯 싶었다.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한데 나만 그렇치 못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만은 무척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입니다. 스님. 저도 보시라는 것에 동참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1개월 전에 계를 하나 들어 오늘 탔습니다.

돈이란 보면 쓸 곳도 많지만 절약이 얼마나 좋은 건지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기분이 참 좋군요. 부처님과의 약속이었고 저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게 되어 무척 즐겁습니다. 저의 집 두 남매는 학교에서 공부는 하위권이지만 세상을 살아갈 때 늘 꿋꿋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빌고 있습니다.” 편지에는 어디에 써달라는 말도 없이 500만 원짜리 수표가 동봉되어 있었다. 단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모임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에 써 달라는 내용뿐 이었다. “세상은 이렇다. 한쪽은 흙의 은혜마저 저버린 탐욕스런 배은망덕의 손이 있는가 하면.” 넉넉잖은 살림에 푼푼이 모은 돈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가슴을 여는 은혜의 손길이 있다. 우리 이웃에 이러한 손길이 있어 이 땅에 밝은 해가 오늘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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