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싫은 옥천, 떠나고 싶은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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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기 싫은 옥천, 떠나고 싶은 옥천
  • 최장규 옥천향수신문 대표
  • 승인 2019.09.19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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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규 옥천향수신문 대표

떠나기 싫은 집과 떠나고 싶은 집.

끼니가 걱정인 집에 가도 떠나기 싫은 때가 있다. 보리밥에 드문드문 섞인 고구마만 줘도 즐거운 집이 있다. 그러나 고기반찬에 이밥을 줘도 좌불안석인 집이 있다. 이런 집은 빨리 떠나고 싶다. 떠나고 싶은 집에서 밥 한 끼 먹는 것은 곤혹스럽다. 이런 경우를 혹자는 경험하였을 것이다.

두 집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자는 모든 사물이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하여도 따뜻한 온기가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사람이면 본디 가지고 있는 따뜻하고 갸륵한 마음이 존재한다. 그러나 후자는 사리에 어긋나고 흉악하여 인정이 없는 집이다. 물론 “인정에 겨워 동네 시아비가 아홉”이라면 큰일이다. 즉 인정에 끌려 무슨 일이든지 정당하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을 만났다. 편의상 ‘바우’, ‘차돌’, ‘몽돌’이라 하자.

바우는 귀농을 하였다. 아니 귀촌을 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귀농귀촌을 한 모양새다. 그는 도시생활에 지쳤다한다. 그래서 시험 삼아 농사도 하고 사람 냄새나게 살고 싶었다한다. 바우는 꿈에 부풀었다. 몇 년에 걸쳐 살 곳을 마련하였다. 그는 열심히 노력하면 그것에 대한 열매가 맺어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디 세상살이가 그리 만만하던가? 산 설고, 물설었다. 그런데 농사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빈정거렸다. 그들은 ‘잘난 척’이나 ‘도시 놈’이라는 또 다른 명함을 지닌 자로 이미 바우에게 낙인을 찍어둔 상태였다.

‘차돌’도 옥천에 왔다. 차돌이 주변 사람들이 패악스럽게 굴었다. 물론 차돌이에게도 문제가 있었겠다. 그들은 대놓고 도둑질을 해간다거나 칼을 들이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이웃은 은근히 도리에 어긋나고 못되게 굴었다. 주차장 앞에 못을 거꾸로 박아 놓는다든지, 손님이 오면 시끄럽다든지……. 심지어 개 짖는 소리마저. 대도시 아파트 공동주택단지도 아닌 시골 마을에서 동물과 함께 상존(相存)하여야 한다. 그러나 예의에 벗어나는 소리로 일관한다. 물론 개 짖는 소리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웃과 동물과 자연이 상생하고자 하는 생존원리에 어긋난다. 이해가 퍽 부족한 이웃들이다.

‘몽돌’은 카페를 한다. 주변 경관이 좋아선지 찾는 이가 많았다. 그런데 다정한 퍽이나 과도하게 다정한 이웃이 문제였다. 수입이 좋아보였던지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서로 씻을 수 없는 생채기를 남길 언어들이 오갔다. 위법이니 탈법이니 거창한 말들이 오갔다. 그 사이에 공무원들도 들여다보았다. 공무원들은 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이 문제는 뾰족한 답안지를 작성하지 못한 채 고름딱지만 생성되었다. 그 고름딱지는 언제든지 긁으면 피와 함께 상처가 드러날 터이다.

물론 사회생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국가기관에서 제정하여 채택된 규범인 법을 어기면 안 된다. 이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국민의 의무적 행동준칙의 총체며 체계적이고 물리적인 강제가 가능한 것이 법이다. 그렇다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며 ‘CX’, ‘JX’하며 매양 싸울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차치하고 옥천에 오는 사람들. 그리고 옥천에서 살고자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따뜻한 인정을 베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놀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을 먹여 살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열심히 일하고 이웃과 배려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안아주자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자연권의 하나인 생존권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하거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생존권적 기본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이 정붙이고 살아갈 수 있는 옥천으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

옥천군의 자연경관이 좋은 곳은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대부분 수장되었다. 그 댐 건설로 군민들에게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법이라는 족쇄가 채워져 마음대로 영업(사업)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런데 요즘 그 대청댐 풍경이 아름다워 옥천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기도 하였다.

대대로 농부로 살던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어부가 되기도 하고, 고향을 떠난 실향민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나마 농부나 어부의 자식들은 도시로 보내진다. 젊고 똑똑한 자식들일수록 대도시로 간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지역구를 지키며 정치를 하기 위하여 돌아오는 경우도 있긴 하다고.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이 성공하거나 그렇지 아니한 도시인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언젠가 귀향하거나 혹은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근래에 옥천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옥천군의 대대적인 홍보에 힘입은 바 있을 것이다. 귀하게 찾아와준 사람들. 적어도 그 사람들을 쫒아내는 일은 없도록 하여야할 것이다. 법이라는 족쇄에 묶였다고 우리의 인정마저 가두어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익에서 너무 멀리 가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적절한 허용기준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것은 옥천에서 살고자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감로수 같은 역할을 하겠기에. 만약 그렇지 아니하다면 삼삼오오 옥천을 찾아온 사람들과 자연을 벗삼고자하는 이들의 발길을 끊어놓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떠나기 싫은’과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가 정하는가? 신이? 아니면 부모님이? 스승님이? 아니다. 그 마음은 옥천군민이 정하여 준다. 군민의 배려를 통한 인정에서 저절로 생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지방자치시대에 주어진 혹은 바라는 바는 남들과 같은 길을 가는 획일화된 이념이 아니다. 적어도 옥천군만이 향유할 수 있는 생존권을 지켜줄 수 있는 허용기준치의 규칙을 마련하는 일이다. 좀 더 융통성 있고 창의적인 그리고 배려심 깊은 규칙 말이다. 그리하여 ‘떠나기 싫은’을 넘어 ‘자꾸만 가고 싶은 옥천’으로 거듭나야 한다.
모두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바우’와 ‘차돌’ 그리고 ‘몽돌’ 같은 전철을 다시 밟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옥천을 찾는 손님이나 이주민(移住民)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 부족하여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옥천군수나 옥천군의회 의장, 혹은 고위직 공무원……. 이들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거나 트집을 잡아 지나치게 따지며 힐책하여서는 안 된다. 옥천에 오는 손님과 나는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이라고 뒷짐만 지고 있으면 되겠는가. 이제 우리, 즉 옥천군민 모두가 손님과 이주민을 맞이할 자세를 갖추어야 할 때이다. ‘떠나기 싫은’ 그리고 ‘자꾸만 가고 싶은’ 옥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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