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라는 말의 진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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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순위’라는 말의 진정성
  • 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 승인 2019.10.02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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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웅 충북일보 전 논설위원

우스개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엄마와 아내와 자식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건져내겠느냐는 것이 질문인데, 서양 사람들은 제일 먼저 아내를 건져내고. 두 번째로 자식을. 세 번째로 엄마를. 구해낸다는 것이다. 아내가 있으면 자식은 얼마든지 새로 낳을 수 있다는 것이 서양의 가치관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 동양에서는 엄마를 제일 먼저 구해내고 그 다음엔 자식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내를 구해냄으로써 동양의 효(孝 )를 가장 중요시한다. 나를 낳은 부모님과 아내와 자식들.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 중에서 누가 가장 소중한 사람인가를 순서 매기는 최종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실제로 어렸을 때 들었던 그 이야기대로 내 앞에 동시에 세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본 느낌까지 들었다.

나는 고민 끝에 우선 내 아이들을 지웠다. 자식들이 물론 소중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인생이 있음으로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내일의 집에 사는 미래의 영혼들인 것이다. 나는 그들을 내일의 집 앞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집 안으로 방문해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두 사람이었다. 나를 낳은 부모님과 아내. 나는 우선 효를 미덕으로 삼는 동양적인 가치관대로 나를 낳은 부모님을 고마운 사람 1순위에 올리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높은 부모님의 은혜를 1순위로 올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냉정하기로 했다.

고정관념에 휩쓸리는 일 없이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내게 있어 나를 낳은 부모님은 최초로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를 낳아주었으며 나를 길러 주셨다.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자부심과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셨으며 또한 어느 정도 재능까지 물려주셨다. 부모님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2순위로 물러가 버릴 만큼 아내라는 존재가 가벼운 것일까.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모인가 아내인가 내게 있어서 가장 고마운 사람 1순위는 과연 누구인가.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아내와 더불어 일본에 갔을 때의 추억이었다. 그때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TV 다큐멘터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아내는 구경삼아 우리 취재팀을 따라 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오사카의 번화가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촬영을 마치고 오니 아내는 방에 없고 탁자 위에 다음과 같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 백화점 구경하고 늦기 전에 돌아올게요. 해질 무렵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한 생각이 드러나는 호텔을 나와서 어쩌자는 생각 없이 큰 길까지 나가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사카의 번화가에는 밤이 되자 마치 개미 떼처럼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그 혼잡한 인파 속에서 아내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가로수에 몸을 기댄 채 거리의 이쪽과 저쪽을 바라보면서 아내를 찾고 또 찾았다. 비록 아내의 얼굴이 익숙해 있다 해도 낮선 외국애서 저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한 사람뿐인 내 아내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때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점 하나가 내 눈을 강하게 자석처럼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점을 바라보았다.

아내였다. 아내는 울긋불긋한 네온 속에서 천천히 호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종이백을 들고 있었고 오랜 백화점 구경에 지친 듯이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나는 반가워서 뛰어가려 하다가 발을 멈추고 그냥 아내의 모습을 훔쳐보기로 하였다. 아내는 지쳐서 몇 발자국 걷다가는 거리의 쇼윈도 안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또 다시 생각난 듯 걷고 있었다. 저 여인이 내 아내일까 하고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저 여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 여인이 내 아내란 말인가. 김광섭의 아름다운 시처럼 저 어두운 거리에 서 있는 여인은 저 광대한 우주 무한의 공간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내가 쳐다본 별 하나인 것이다.

저 여인은 내가 쳐다보았음으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에서 내게로 다가와 내 아내가 되었다. 또한 저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별빛을 받아들인 단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아내와 나는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가 되었고 언젠가는 나비와 꽃송이가 되어 다시 만날 절대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그날 나는 서슴지 않고 아내를 내게 있어 고마운 사람의 1순위로 결정했다. 김광섭의 시처럼 언젠가는 나비와 꽃이 되어 다시 만날 아내는 1순위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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