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청산은 동학의 메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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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청산은 동학의 메카다(2)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10.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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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조설말엽 탐관오리, 외세 침탈
동학도가 일으킨 동학농민전쟁은 목적은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척양척왜의 강력한 실천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불같이 일어났다. 권력의 속성상 오래 고인 물은 썩게 되었다.
조선 말엽 국가 지도층인 양반계급은 개국 이래로 500년 간 누적된 성리학적 유교민본주의의 형식적 매너리즘에 빠져 실학보다는 명분론에 함몰되어 조선 왕조는 심각한 국가 망국의 증상을 보인다.
조정은 무능하며 부패한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사회지도층인 양반층은 나라와 백성들의 안전과 행복보다는 당파와 자신의 출세와 탐욕을 위해 골몰했다. 이와 함께 백성의 피 같은 돈인 혈세를 착복, 횡령하였고 백성들에게 협박과 폭력까지 동원하여 금권과 이권에 탐학하는 등 악행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왕까지 뇌물 받고 벼슬 팔아
궁궐 내탕금이 부족한 왕가까지도 뇌물을 주고 벼슬을 파는 일까지 있었다. 그 당시 관찰사는 10만 냥, 군수 3만 냥, 현감은 1만 냥의 뇌물로 관직을 사고팔았고 아전들까지 몇 배의 과중한 세금을 거둬 상납하였다. 그 당시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왕부터 사회지도층 이하 아전까지 온탕 부패하여 일반 백성의 고통을 필설로 어찌 표현하겠는가?
이같이 부패한 조선의 지도층으로 인해 일본에 나라가 패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피 같은 세금과 과중한 부역과 함께 관리들의 폭압과 학정에 시달리던 조선 백성의 만민평등과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동학전쟁은 부패하고 썩어 빠진 무능한 정부에 도전한 내란적 성격과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조선 백성의 의지가 크게 배여 있다.
역사적이나 국제적인 넓은 시야로 보면 동학농민전쟁은 청일전쟁을 촉발 시켜 청국으로부터 형식적으로 독립하나, 일본의 식민지화 길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동학전쟁은 외국세력에 침탈되는 국익을 지켜 국가를 보존하고 봉건왕조의 신분제도 타파와 만민 평등사상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지자, 이후 조선 정부는 정치, 사회, 행정제도 등 갑오개혁을 단행하게 했다. 또한 중국에서 1899~1901년 산동지방에 일어난 외세배격운동인 ‘의화단 사건’에 큰 자극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는 역사적 운명은 지정학적 위치로 동북아시아 질서의 차원에서 결정된다는 것은 삼국시대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이 한·중·일간 세력 판도에 따른 역학구조 관계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후천개벽 수운 최제우 동학 창시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42~1864)는 경주에서 태어나 오랜 구도 끝에 경북 37세 때인 1860년 봄에 ‘갑자기 몸이 떨리면서 황홀한 경지에 이르는’ 종교체험을 하며 동학(東學)을 창교한다. 동학은‘후천개벽’과 ‘만민평등’의 새 세상을 부르짖으며 보국안민,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을 널리 포교한다.
조선 말기에 외척세력의 득세로 권력을 독식하며 왕권은 추락하고 그들이 중앙과 지방의 관직까지 독차지하며 아전들까지 전횡을 일삼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과중한 세금과 부역으로 백성들의 삶이 몹시 어려웠다.
그에 따라 전국 곳곳에서 자주 민란이 일어나 ‘새 세상’을 꿈꾸는 백성들에게 동학은 큰 호응을 얻으며 교세가 확산되자, 조선 조정은 서학인 천주교에 이어 1864년 최제우 교주를 체포하여 처형하는 등 동학을 심하게 탄압하였다. 이후 30년간 강원, 충청, 전라도 산간지역을 숨어서 포교 활동을 한 2대 최시형 교주에 의해서 동학은 재건되고 교세는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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