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청산은 동학의 메카다(4)
상태바
옥천 청산은 동학의 메카다(4)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10.24 16: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조난예식과 보은취회 결정지 청성포전
동학농민전쟁 당시 옥천군과 청산현 등 충북 남부지역은 동학교세가 컸다. 김연국 보은대접주는 1893년 3월 최제우 교주 신원회복운동의 일환인 보은집회(취회) 당시 옥천군 청성면 거포리 포전 마을에 살았다.

해월 최시형 교주의 최측근인 김연국 집에서 교주 최시형이 거주하며 보은 장내리 대도소를 오가며 동학교도를 포교하고 지도한다. 그리고 거포리 포전 김연국 집에서 최시형 교주와 전국 동학지도자들이 모여서 최제우 교주의 조난예식을 치루고 보은집회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보은 장안면 장내리에 집결하도록 하여 더욱 동학농민전쟁사에 매우 큰 의의가 있는 동학유적이다.
 
동학군 재기포 명령지 청성 소사동

특히 1894년 9월 18일 최시형 교주를 비롯한 북접동학군 통령 손병희 등 북접 동학수뇌부가 옥천 청산에 모여 전국 동학교도들에게 무장봉기(재기포)를 명령한 곳도 바로 청성면 소서리 소사동(작은뱀티)은 동학농민전쟁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이다.
재기포 명령지인 청성면 소서리는 북접동학군 태동기에 동학수뇌부가 모여서 보은집회를 결정한 거포리 포전마을과 최시형 교주 가솔들이 그 당시 살았던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 마을은 동학농민전쟁에서 매우 의미가 깊은 곳이다.
일본은 인천항을 통해 한양에 진주하고 주력부대는 청일전쟁 수행을 위해 평양과 압록강으로 청군을 섬멸하기 위해 진격하고 그의 일부인 일본군 후비보병 독립19대대는 동학군 진압을 맡아 서울에서 3개 방면으로 각각 1개 중대씩을 편성하여 남하하며 관군과 연합작전으로 동학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동학의 메카 청산 문바위마을
1893년 3월 11~20일까지 보은집회를 마치고 해산령에 따라 최시형 교주는 피신 길에 올랐다. 최시형과 측근 동학지도부는 경상도 칠곡-안동-김천-문경(7월)을 거쳐 최시형과 가솔들과 함께 초겨울에 청산현 한곡리 문바위골로 피신하여 마침내 갑오 동학농민전쟁 해인1894년을 맞이한다.

더욱이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는 재기포 명령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최시형 교주와 사위 김연국 대접주, 정순철 모친 최윤 등 가족들과 몇몇 측근들이 이곳 김성원 집에 머물면서 전국의 동학교도들이 옥천, 영동, 보은 충북 남부지역에 집결하여 동학군 편성과 훈련하며 동학전쟁을 지휘하였다.

또한 1894년 12월 동학군 후퇴기에도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장소로 인근에 최시형 교주의 아들 최 부품 묘소, 불에 탄 거목과 동학군의 이름이 새겨진 문바위 등 동학 관련 유적군이 있다. 한곡저수지 위쪽 계곡의 폭포 바위에는 장수발자국과 계화공주의 전설이 구전되어 온다. 매년 이곳 큰 느티나무 아래 마당바위에서 『청산 동학제』가 옥천민예총 회원들에 의해 열렸다.

이 같은 동학전적지로 옥천군은 2011년부터 청산 한곡리 문바위 일대에 주차장을 설치하고 동학혁명기념비 등을 조성하여 청산 동학공원을 조성하였고 이후 문암저수지 위쪽 계곡에서 밤재 산능선에 동학탐방로 3km를 조성하였다. 또한 청산읍내 청산대교 가로공원에는 청산재기포 100주년기념비를 천도교 중앙본부에서 건립하여 청산동학의 역사적 의의를 기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