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宋時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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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宋時烈)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19.10.30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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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이원 구룡촌 출생, 동국 18현, ‘宋子’라 함.
조선 중기 대유학자로 본관은 은진, 호는 우암(尤庵)이다. 병자호란의 충신 부친 수옹 송갑조와 선산 곽씨 사이에서 옥천 이원 구룡리 출생하였다. 그의 외할아버지 곽자방 선생은 조헌의병 참모장으로 임진왜란 때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조헌 선생을 비롯한 700의사와 함께 순국한 충신이다.

□조선왕조실록 3천번 기록,
중국서 宋子로 불림

송시열 선생은 한국 역사상 성리학의 최고봉으로 예학(禮學)의 대가이며 노론의 영수로 효종과 북벌정책을 주도했고 전국 70여 개 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특히 그는 중국에서 송자(宋子)라 불릴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그리고 성균관 문묘와 전국 330개 군현의 향교에 동국18현의 한 분으로 모셔졌고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번 기록되었다.

□장희빈 아들 세자 반대,
제주 유배 정읍 사약 받음

그러나 숙종 때 장희빈의 장자 세자 책봉에 반대하여 제주도 등지로 귀양 갔다가 왕명으로 상경하다 전라도 정읍에서 금부도사의 사약을 받고 네 왕을 섬긴 중신인 우암 선생은 83세에 순명하였다. 조선 후기 약 250년간은 송시열 선생의 성리학적 이념으로 조선조정은 경영되다시피 했었다.

우암 선생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10년 후인 1607년(선조 40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나서 구룡촌 용문서당에서 수학하고 8세 때 대전 회덕의 친척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집에서 함께 공부하였고 26세까지 옥천 고향에 살았다.

1625년(인조3)부터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金集)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27세 때에는 생원 과거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1635년에 봉립대군(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립대군이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관직을 그만두고 영동 황간의 월유봉으로 낙향하여 10년간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몰두했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며 9월 이조판서에 올라 다음 해까지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는 대전 회덕과 유성, 영동 황간 월유봉 등지에서 27~50세까지 살았고 60대 이후 괴산 화양동 계곡의 암서재에서 살았다.

그러나 1659년 9월 효종이 갑자기 급사한 뒤,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나고 왕비의 아버지인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과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다시 낙향하였다. 서인들이 패배하자, 그도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경연사로 임명되며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 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직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 임신년 고변사건에서 그는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였다. 이 고변사건으로 서인의 소장파에게 비난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1683년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한다.

1689년(숙종15) 1월 숙의장씨(장희빈)가 아들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송시열도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았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관직은 회복되어서 다음해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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