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인생 다른 길, 화성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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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인생 다른 길, 화성리 사람들
  • 도복희기자
  • 승인 2019.11.21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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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평생 오롯이 자식만 바라본 삶
이젠 회관에 모여 화투치는 재미
“부식비 지원 없어, 쌀도 부족”

청성면 화성리 마을회관에 새타령이 울려 퍼졌다. 귀촌인 권종현, 라재순 부부가 해 온 짜장밥을 함께 먹은 후였다. 어르신들은 오랜만의 흥겨운 가락에 어깨춤을 저절로 들썩였다. 평생 땅을 일궈 자식들을 키운 화성리 어르신들이었다. 서로 비슷한듯한데 다른 짐을 짊어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분들의 인생 얘기는 짧고 간단했다. 무심한 듯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는 직접 견디고 살아냈기에 그대로 울림이 되었다. 화성리 주민들의 살아온 이야기에는 마을의 산역사다. 그들의 이야기를 이곳에 옮긴다.

△화성리의 산 역사
전형완(84) 어르신은 아들만 4형제를 뒀다. 3명은 서울에 살고 있고, 1명은 대전에 살고 있다. 손자 2명, 손녀 2명이 있다. 전 어르신은 “담배농사를 지어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했다”며 “젊어 고생을 하도 많이 해서 겨울엔 맘대로 걷지를 못한다”고 지나간 시간을 돌아다보았다.
이어 “우리 마을 앞에 있는 하천에 물개가 살고 있다”며 “아침에 물개를 직접 보기도 했다”고 다리 위에서 그 위치를 손으로 가리켰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마을 앞 하천이 깨끗이 정비되기를 바라는데 나 역시 그러하다”며 “우거진 물풀을 없애고 맑은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정비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김기례(79) 어르신은 요즘 농사지은 가을걷이로 바쁘다. 고추를 다 따고나서는 비닐은 걷어야 하는데 해가 짧아져서 일할 시간이 많이 부족하단다. 어르신 역시 22세에 시집와 4형제를 뒀다.
남상숙(78) 어르신은 22세에 시집와 2남 2녀를 뒀다. 농사지어 키운 자식들은 일산, 청주, 인천, 용인에서 각각 독립해 살고 있다. 사별하고 지금은 혼자 살고 있는데 마을회관에 나와 민화투도 치고 누워서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며 지낸단다. 남 어르신은 “화성리는 마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인심이 좋고 서로를 배려하며 지내 어려운 시절도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다”고 했다.
김복달(83) 어르신은 25세에 시집와 남편(전종환·81)과의 사이에 3남 1녀를 뒀다. 자식들은 다 출가하고 지금은 부부만 화성리에 남아 살고 있다. 김 어르신은 “시골에 일이 너무 많아 몸만 부서졌다”며 힘든 시절에 대한 회한을 한 마디로 던지듯 말했다.
김신임(79) 어르신은 23세에 시집와 남편(전성우·84)과의 사이에 2남 3녀 5남매를 낳았다. 인심도 좋고 살기 좋다고 말하던 김 어르신은 일 얘기가 나오자 “논농사며 밭농사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살았다”며 “시골 사는 게 일이 너무 많이 힘들었다. 좋은 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세월이 지나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자식들 키우느라 고된 세월을 견딘 것인데 어미의 마음을 아는지 자식들이 잘 자라줘 더 바랄 것 없이 고맙다는 김 어르신은 “지금은 콩 한 포기 못 심는다. 밥도 간신히 끓인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정완(79) 어르신은 4남 2녀를 두고 남편이 44세에 하늘나라로 떠나 혼자 되었단다. 혼자된 몸으로 6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한 것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며 지금은 더 이상 바라는 게 없고 이대로 지내다 잘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살아 있는 날들이라고 했다.
김정임(89) 어르신은 18살에 시집왔다.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 얼마 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딸하고 같이 살고 있다.
전창순(90) 어르신은 “내가 90인가”라고 되물었다. 어르신은 화성리가 고향이라고 했다. 안내면 동대리로 시집갔다가 70대에 다시 고향으로 와 살고 있다.

△바람
전영우(75) 마을노인회장은 “건물 2개 층에 우리 지역 노인들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어 쌀과 부식비는 물론 난방비 등 운영상의 어려움이 있다”고 호소했다. 부식비는 아예 예산에 잡혀있지 않아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상태다. 전 회장은 “노령층 인원이 많아 지급되는 쌀로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로 쌀과 부식비, 난방비 정도는 지급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위치와 연혁
화성리는 청성면 중북부에 위치하며 19번 국도가 동쪽 화성리를 거쳐 석성리 북부 지역을 통과한다. 장연천이 중앙지를 관류하며 옛 화성초등학교가 있었다. 면적은 6.01km²이다. 지리적으로 동쪽은 장연리, 남쪽은 거포리, 서쪽은 대안리, 북쪽은 도곡리에 접하고 있다. 원래 청산군 서면 지역으로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서 대화동(大和洞)과 석성리(石城里)를 합쳐서 화성리라 했으며 옥천군 청성면에 편입됐다. 이후 1929년 청성면으로 개편했다. 석성리와 화동리 2개 리이며 주요 성씨로 석성리는 성산 전씨 집성촌이며, 화동리는 이천 서씨가 누대에 걸쳐 산다. 화성보건진료소가 있다. 화성리의 중심마을인 석성리는 자연마을로 양지쪽에 양지마와 음지쪽에 음지마가 있다.
동학농민전쟁기인 1894년 가을에 3만 명의 동학군과 일본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지역이다.  석성리에는 이 마을 남쪽 경계지에 자리한 신라성인 저점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돌을 쌓은 석성으로 축성되었다는 점에 연유해 석성리라 부르게 되었다. 행정리는 석성리이고 자연마을은 돌잣이의 양지마와 음지마, 유문거리가 있다. 주요 성씨는 성산 전 씨로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처음 파주 염씨가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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