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가면 의병장 중봉 조헌선생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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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가면 의병장 중봉 조헌선생을 만날 수 있다
  • 임요준기자
  • 승인 2019.11.2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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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박물관 박희구 관장
중봉집 12권 부록 7권 소장
조헌선생 기리는 만포선생의
시집 가산 만기단 ‘만포유고’
문헌록·일성록·족보수진본까지
조헌선생에 관한 모든 자료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신 조헌(趙憲 1544년~1592년).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옥천과 특별한 이유는 바로 옥천인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김포가 고향이나 옥천에서 거주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이다. 그런 그와 옥천 가산박물관(관장 박희구)은 또 다른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중봉선생 자료라면 행여 놓칠세라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박희구 관장을 만났다.

중봉 조헌선생을 발견하는데 교과서적이 바로 중봉집이다. 20권 10책(13권, 부록 7권)으로 고활자본이다. 조헌이 1574년(선조 7) 중국에 갔다 온 뒤 쓴 동환봉사(東還封事) 1권과 항의신편(抗義新編) 2권을 안방준과 유장이 가장초고를 바탕으로 편찬했다. 이후 1666년(현종 7) 민유중이 원집 4권을 간행했는데, 이를 종합해 1698년(숙종 24) 왕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하고 그 명칭을 ‘중봉집’으로 일원화했다. 그 뒤 다시 영조의 명으로 재편·증보해 1748년(영조 24) 간행했다.

내용 중에 논향축소(論香祝疏)는 1572년(선조 5) 6월 내입삭향급자수궁성수청봉향(內入朔香及慈壽宮星宿廳封香)의 그릇됨을 주장한 상소문으로, 이 상소로 인해 삭탈관직 됐다. 이후 옥천으로 내려와 옥천과 중봉선생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비왜지책(備倭之策)은 호남지방을 지킬 것, 왜적이 피로할 때를 기다려 유격전술로 공격할 것 등 왜적을 물리칠 방법을 말한 것이며, 정대책(庭對策)은 학교를 세워 영재들을 가르치고 교화를 돈독히 하며, 과거를 실시해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어진 임금이 하는 밝은 정치라는 내용이다. 규장각·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다. 박희구 관장이 소장하고 있는 중봉집은 1700년 경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1권과 다시 1900년 경 추가 발행된 12권과 부록 7권이다.

박 관장의 중봉 흠모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중봉과 관련된 자료라면 그는 언제 어느 때고 달려가 모았다. 안방준의 항의신편, 중봉선생을 기리며 가산 만기단에서 쓴 만포선생의 만포유고도 소장하고 있다. 필사로 기록된 일성록에서도 중봉선생을 만날 수 있다. 조선승무유현년표에도 중봉선생은 이름을 올렸다. 또한 박 관장은 배천(白川) 조씨 족보도 소장하고 있는데, 이중 수진본은 특별하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조선시대엔 자신의 족보를 소매 속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작은 족보 수진본이 있다. 박 관장은 배천 조씨 족보수진본도 소장하고 있다.

1971년 발행된 칠백의총과 국토방위에도 이름을 올렸다. 옥천문화원이 1978년 발행한 의병장 중봉 조헌과 1977년 제2회 중봉충렬제 팜플랫을 비롯해 영규대사와 함께 소개된 충남 공주시 발행 공주전설도 소장하고 있다.

박 관장은 “조헌선생은 문인이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장이시다. 그런 훌륭하신 분이 옥천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러기에 조헌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게 됐다”고 의미를 전했다. 그러면서 “중봉충렬제가 과거에 비해 해가 갈수록 축소 개최되고 있어 안타깝다. 충신을 기리고 의미를 되새기는 제를 더욱 확대해 후손들,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충효사상을 새기는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고 고견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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