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짓기 놀이
상태바
이름 짓기 놀이
  • 박하현 시인·시집 ‘저녁의 대화’
  • 승인 2019.12.12 1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하현 시인·시집 ‘저녁의 대화’

아침엔 서리가 내렸고, 오전 외출엔 찬기가 역력했는데 볕이 등을 따끈하게 데워주는 오후가 되었다. 이제 곧 십이월인데 장미가 피어 있는 마당, 여기저기 떨어져 날린 낙엽들을 치우며 살짝 땀을 흘릴 정도였다. 며칠 전 함께 점심식사를 했던 지인이 ‘올해는 가을이 길어서 좋아요’ 했던 말이 떠오른다. 문득 십일월을 ‘긴 가을의 달’로 이름 지어 보면 어떨까 하다가 인디언식 달력이 생각났다. 그들은 부족에 따라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 ‘모두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닌 달’, ‘기러기 날아가는 달’, ‘강물이 어는 달’ 등으로 십일월을 불렀다. 어느 것 하나 건성으로 부를 수 없는, 사물과 사유를 가득 담고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다.

얼마 전 출간한 시집을 여기저기 전달하는 과정에 있다. 가족 이웃 친지로부터 시인 계간지 대표 이름까지 이름 석 자만 쓰기엔, 일상적으로 무심하게 부르는 달력의 일월 이월 같아 나만의 특별한 명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백여 명이 넘는 분들께 존경의 마음, 고마웠던 기억, 친밀감의 표현 등을 고민하면서 진도가 더디고 녹록치 않은 작업을 하고 있다. 다행히 적어가는 과정에서 대략 서너 가지 유형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랑과 축복을’, ‘존경과 감사를 ’, ‘나의 ㅇㅇ에게’, ‘평화와 온기’ 등이다. 그중 간절한 마음으로 고심해 얻은 ‘평화와 온기’의 표현은 겨울을 보내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축복의 말이다.

이름은 새로운 시작이자 출발선이다. 갓난아기, 처음 발견한 사물, 발명품 등이 그렇고, 처음 지은 의미와 묶음인 새 단어, 책 제목들도 여기 속하게 될 것이다. 봄부터 시의 제목 정하기, 발간할 책의 제목을 결정하는 시작과 출발 선상에 서 있었다. 그 이름들은 기다림 끝에 바람이 스치듯 순간 찾아오기도 하고, 어떤 사물을 오래 들여다보거나 생각하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느 경우 행과 연, 은유와 사유를 잘 아우르는 것인지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끝에 오기도 한다. ‘지금 사과해’, ‘도마 우정을 생각함’, ‘어긋난 기억의 힘’의 시가 그렇다. 다른 경우 웃어른의 의견을 물어 완성하기도 한다. 인디언들의 달력은 그랬을 확률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어른 인디언들은 아이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던 아이들이 우르르 뒤로 물러나 머리를 맞대는 바람에 놀란 교사에게 학생들이 따옴표의 말로 대답했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게 선배 시인과 머리를 맞대 얻은 제목은 ‘지난 시간을 지내다’ 시편이다.

시 제목보다 시집의 제목 정하기는 언뜻 쉬워 보였다. 책에 넣을 시 중에서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르면 되겠지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오십 여 편의 시를 종합해 표현해야 하는 개인적인 부분과 출판물로서 독자들의 안목을 고려해야 하는 사회적인 부분이 하나로 결집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정했던 ‘약속이 있었겠지요’는 출판사와 접촉하자마자 애당초 탈락했고 ‘지금 사과해’는 다른 책의 것과 비슷해 사용할 수 없었다. ‘어긋난 기억의 힘’에 동의했지만, 책의 제목으로 삼기엔 내용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결국 찾아낸 ‘『저녁의 대화』는 웃어른과 출판사 대표와 가족이 합의한 결과물이다. 이를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사물을 명명하게 하셨던 하나님과 그것을 실행했던 아담의 천재적 창의성, 그 큰 은총과 축복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기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름 짓는다는 것은 깊은 관심이며 사랑이다. 아가의 태명을 지어 부르는 것은 ‘우린 너를 온 마음으로 사랑하며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다. 꽃 이름 안에는 이름을 넘어서는 꽃말이 있어 의미를 더한다. 안네가 일기를 쓰며 일기장에 이름을 붙였던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일 것이다. 급변하고 세련 넘치는 현대를 살면서 사람도 자연도 이름을 잊어간다. 갈수록 축약해 부르는 일월 이월의 세상이 되어간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일컬어 과목명 ‘수학’, ‘국어’로 부르는 걸 들었다. 학생도 교사도 말하지 않지만, 관심과 사랑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살고 있는 집, 도시, 우리나라,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미 이름 지어진 많은 것들을 새롭게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분주한 연말이 다가올수록 천천히 뒤처지며 가고 싶다. 내 주변의 사람은 물론이고 길, 나무, 건물에 평화와 온기 담은 긴 이름을 붙여주면서 게으르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