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의 피 얼마나 거둬들였나…대동법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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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피 얼마나 거둬들였나…대동법의 흔적
  • 임요준기자
  • 승인 2019.12.19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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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를 시작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 순으로 선혜청 설치
가산박물관, 8m에 이르는 징수목록서
지역별 징수 품목·양까지 세부적 기록

옥천에선 포목 25필, 쌀 22가마 거둬

이두문자로 기록, 현대인 해석 어려워

예나 지금이나 백성으로부터 거둬들이는 세금은 국가재정에 밑바탕이 되고 있다. 백성의 고충을 덜기 위해 세금을 내리기도, 하지만 과도한 세금징수는 국민 저항운동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대동법이 그러했다. 

대동법은 1608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서 우선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시행됐다. 이후 찬반양론의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는 가운데 1623년(인조 1) 강원도에서 실시됐다. 17세기 중엽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순으로 확대됐고, 1708년(숙종 34)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호역(戶役)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貢納)과 잡역(雜役)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으며 중세적 수취체계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였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새로운 토지세인 대동세를 부담하게 된 양반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대동법 하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 징수했고, 과세의 기준도 종전의 가호(家戶)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꿨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 당 쌀 12두(斗)만을 납부하면 되었으므로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농민(無田農民)이나 영세농민들은 일단 이 부담에서 제외됐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운반의 편의를 위해서나 쌀의 생산이 부족한 고을을 위해 포(布)나 전(錢)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따라서 충청·전라·경상·황해의 4도에서는 연해읍(沿海邑)과 산군(山郡)을 구별해 각각 미 혹은 포·전으로 상납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공납의 전세화를 기본으로 하는 대동법은 지금까지의 현물징수가 미·포·전으로 대신 됨으로써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촉진했다.

이를 관리하는 전담기관으로서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고, 여기서는 징수된 대동미를 물종에 따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각 궁방과 관청에 공급했다. 따라서 공물의 조달은 선혜청으로 일원화됐다.

하지만 대동법에 대한 긍정적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조세사학회 오기수 전 회장은 저서 ‘조선을 망친 대동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동법이 백성을 위한 조선 최고의 개혁이었을까? 우리는 이제까지 그렇게 배우고 그렇게 알았다. 잘못된 역사적 평가다. 세금이 열 배나 가벼워졌으니 불공평해도 된다고, 불이익을 받아도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법은 얼마나 공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물론 대동법의 입법 목적만큼은 공감을 얻고 칭송받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대동법은 부자 양반들에게 너무 유리하게 만들어졌으며, 서민에게는 세금폭탄을 안긴 악법이었다. 부자가 가진 비옥한 논보다 가난한 백성이 더 많이 가진 척박한 밭에 세금을 두 배나 올렸다. 그 결과 대동법은 조선후기 경제에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켜 삼정문란의 단초가 됐다. 그러니 현종 4년 사관(史官)은 “대동법의 폐단이 그러한데도 ‘세상에서는 모두 좋은 법(世皆以爲良法)’이라 하면서 변통할 줄을 모른다.(현종개수실록 4년 10월 8일)”고 비판했다”

당시 옥천에서 징수는 어떠했는가? 가산박물관 박희구 관장이 소장한 8m에 이르는 선혜청 징수 목록서에는 각 지역별 징수 품목 및 량이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옥천에서는 포목 25필과 쌀 22가마였다. 당시에는 광목을 정, 돈은 냥, 쌀은 가마니로 표기했다. 병사 한 달 녹봉은 1전, 말 한 마리 값은 열냥이었다. 특히 이두문자로 기록해 당시 관청에서도 이두문자가 널리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 관장은 “세금은 국가 재정에 매우 중요한 원천이다. 조선 중기에서 말기까지 이 자료 하나만 보더라도 각 고을에서 세금을 얼마나 거둬들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이두문자로 표기돼 있어서 당시 이두문자가 널리 사용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의미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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