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망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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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망쥐
  • 장은영 수필가
  • 승인 2020.01.0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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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영 수필가

고망쥐. 내 어릴 적 별명이다. 언니 오빠 남동생 둘 사이에 낀 서열 3순위로 자랐다. 위 아래로 남자가 있어서인지 공기놀이나 고무줄 놀이보다는, 딱지치기 돌치기 구슬 따먹기하며 노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궁금한 것은 못 참았다. 안방 커다란 전축에서 은방울자매 김희갑 어깨를 노출한 서양 금발 미녀의 노랫가락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올 때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후레쉬를 들이밀어 스피커 안 구석구석 노래 부르는 작은 사람들을 찾았다. 함께 놀고 싶었던 사람들이 안보이면 스피커 밑을 살짝 찢어 30센티 잣대를 넣어 후벼보기도 했다. 언제나 잣대가 끌고 나온 것은 작은 사람들이 아니라 뿌연 먼지들뿐이었다.

라디오는 너무 작아서 사람이 들어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는 것이 신기해 분해를 했다. 복잡한 선들과 납땜들의 흔적들만 있어 한 번씩 건들어 보고 그냥 덮곤 했다. 간혹 조여지지 않은 나사들 때문에 덜그럭거렸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아랫입술을 깨무시며 여지없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셨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초능력이 나와 무거운 것도 들어 던지는 외국 드라마 소머즈를 좋아해 툭하면 흉내를 내고 다녔다. 뒷방 열쇠 통이 달린 아버지 사물함이 늘 궁금했다. 손톱깎이 안에 끼어있는 도구를 뺐다. 열쇠구멍에 넣고 ‘짜짜짜짠~’ 소머즈가 괴력을 발휘할 때 나오던 효과음 소리를 내며 돌렸다. 신기하게도 거짓말처럼 열려 깜짝 놀랐다. 노트들과 시커먼 노끈으로 묶어진 영수증들과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아버지 시계와 금색 넥타이핀 등이 있었다. 비닐에 쌓여진 아이보리색 풍선도 보였다. 아버지는 어른인데 왜 풍선을 여기 숨겨놓고 계실까 의아했다. 하나 꺼내 불어보았다. 질끈 묶어 갖고 노는데 얼굴이 벌겋게 되신 아버지가 화를 내며 뺏었다. 왜 화를 내셨는지 왜 뺏어갔는지 성인이 되어 알았다. 콘돔이었다. 그날 이후 사물함엔 쌍둥이 열쇠 통이 철통수비를 하고 있었다.

겨울엔 콘크리트 담벼락 밑을 팠다. 쌀가마니와 비료 포대 등을 얹어 지붕을 만들고 헌 옷들도 바닥에 깔았다. 할머니 방 아궁이에서 연탄도 하나 뺏다. 은색 국자에 설탕을 녹이고 소다를 나무젓가락 끝에 살짝 묻혀 띠기를 만들어 먹었다. 몰래 갖다놓은 시커먼 국자 때문에 엄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곤 하셨고, 아침을 준비하며 새벽에 갈면 딱 인 연탄의 흐름도 어김없이 깨지곤 했다.

우리 집은 하숙생들이 있었다. 그중에 얼굴이 얽은 곰보 아가씨가 있었다. 택시 기사였는데 머리도 짧고 잠바를 입고 다녀 남자 같았다. 이상하고 신기해서 얼굴을 만지고 싶다 할 때마다 엄마는 내 뒷덜미를 잡아당기셨다. “꼼보”라고 할 때마다 내 등을 때리기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큰 소리로 웃던 그 곰보언니가 얄미웠다. 그래서 부엌 들어가는 담벼락에 여자를 그리고 꼼보를 거꾸로 써서 볶은 밥이 아닌 보꼼밥이라고 썼다. 나만 아는 암호라 생각하고 흐뭇했으나 그날 엄마는 시커먼 아버지 예비군 목총을 들고 나를 쫒으셨다.

손재주가 많아 무엇이든 보면 그럴듯하게 만들곤 했다. 특히 가위질을 잘했다. 종이에 인형과 옷을 그리고 가위로 잘라 갖고 놀았다. 어떠한 형태도 가위만 들면 웬만한 성인보다 더 잘 자른다고 칭찬을 받았다. 인형에게 천으로 옷과 이불도 만들어 줬다. 칭찬을 기대하며 엄마에게 보여드리니 화들짝 놀란다. 엄마가 아끼던 옷이라 깊이 넣어둔 거라 했다. “이놈의 고망쥐땜시 내가 못 산다 못살아~~~” 나는 엄마가 한 번도 입지 않아 싫어하는 옷인 줄 알았다.

이젠 아이 셋을 둔 엄마가 되었지만 그동안 딴 자격증도 많다. 궁금한 것은 못 참고 가던 길 보다는 늘 새로운 길에 관심이 향한다. 직접 만져봐야 하고 도전해 봐야하고 맘먹은 것은 기어이 해봐야 한다. 똑같은 모습 똑같은 패턴의 인생은 싫다.

어떤 일을 하던지 어디에 있던지 잘할 자신도 있다. 막연히 입으로만 하고 싶다가 아니라 해보자 해봤다가 되어야 직성이 풀린다. 집안 가구나 환경도 조금씩 달리해서 새로운 기분을 느껴보곤 한다. 가끔씩 다른 모양의 그릇들도 꺼내어 상을 차리기도 한다. 신기한 것이 있으면 가던 걸음도 멈춰 지켜보고 직접 만져보고 느껴본다. 백발머리 할머니가 되어서, 아니 숨이 다하는 날까지 나의 시선과 발걸음은 늘 배우고 새로운 것에 도전할 것이다. 오늘도 오늘에 대한 마주함으로 맘이 설렌다. 고망쥐는 어른이 되어서도 고망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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