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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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메
  • 동탄 이흥주 수필가
  • 승인 2020.01.0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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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 이흥주 수필가

의부 떡메 치는 곳엔 가도 친아버지 장작 패는 옆엔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떡메 치는 곳에야 떡 조각이라도 튀지만 장작 패는 옆엔 장작 파편 나는 것밖엔 없다. 요즘 사람들에겐 떡메란 말이 좀 생소할 수도 있다. 민속체험장 같은 곳에서 떡메 체험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곳 아니면 떡메란 말조차 젊은 사람들에겐 낯설 것이다.

지금은 떡 방앗간에서 떡도 기계로 다 하지만 옛날엔 회갑잔치를 하거나 아들 딸 결혼식이라도 하려면 집에서 떡을 치고 음식 장만하는 일이 가장 큰 행사였다. 잔치 며칠 전부터 동네사람들이 다 모여 돼지를 잡고 떡메로 떡을 치고 음식장만 하기에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결혼식도 내 집 마당에서 올리고 신랑 신부가 가마 타고 오갔다.

인절미나 절편을 하려면 안반이라고 부르는 두껍고 큰 나무판 위에 시루에 찐 찹쌀이나 멥쌀을 얹고 떡메로 친다. 흙으로 된 마당에 짚을 깔고 그 위에 안반을 놓는다. 멥쌀은 치기가 쉽지만 찹쌀이 힘들다. 양쪽엔 아낙네가 둘이 앉고 떡메 치는 남정네가 양쪽에서 치는 대로 밀려나는 떡 반죽을 손으로 우겨 넣는다. 떡메 치는 남정네가 양쪽에 한 사람씩, 우기는 아낙네 두 사람 넷이 박자가 맞아야 한다. 그래야 아낙네 반죽 우기는 손등이 메에 맞지 않는다.

이 떡메 치는 사람은 그래도 동네에 힘깨나 쓰는 사람들이 나선다. 약골은 안 된다. 몰려있는 사람들은 대략 누가 힘깨나 쓰고 잘 한다는 걸 안다. 떡메 잡은 사람은 많은 사람 앞에 힘자랑할 좋은 기회다. 멥쌀은 쉽게 으깨지지만 찹쌀은 다르다. 끈적끈적 메가 잘 안 떨어지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가끔 떡메에 물을 발라야 찰진 반죽이 안 들어붙는다. 이 인절미 칠 때 동네 장정을 알아보게 된다. 떡메 치는 데도 이력이나 수단이 필요하다. 힘으로만 요령 없이 내리치면 귀한 떡 파편이 마당으로 나가 뒹군다.   

떡메야 친아버지가 치던 의부가 치던 떡 파편이 튀니 그 옆에는 먹을 거라도 있다. 장작 파편은 친아버지가 패는 옆이나 의부가 패는 옆이나 인정사정없이 튀니 그 옆엔 절대 가지 말아야 한다.

한쪽에선 돼지를 잡는다. 돼지 멱따는 소리는 이때 나온 말이 아닐까. 돼지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는 잔칫집 들뜬 분위기와는 반대로 처절하게 동네 구석구석을 후벼 판다. 난 어릴 때 그 돼지의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소리에 어린 가슴이 먹먹하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사람들의 잔인성이 어린 머리에 각인이 되었다. 동네 잔치 분위기를 위해 돼지는 안타깝게 죽어야 하니 슬픈 일이다. 돼지고기는 가마솥에 넣어 삶고 삶아진 고기는 건져 잔치에 쓰기 위해 잘 보관하고 대신 삶아낸 국물에 우거지나 시래기를 넣고 끓여 그걸 맛나게 나눠먹었다. 그야말로 돼지가 멱을 감은 물이었으나 그래도 돼지국물이니 그게 어딘가.

돼지를 잡을 때면 우리는 그곳에 우 모여들었다. 국물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그보다는 돼지 오줌보에 더 관심이 많았다. 우리가 눈을 말똥거리며 쳐다보면 거기 어른 한 분이 입으로 돼지오줌보에 바람을 불어넣어 풍선처럼 부풀려 던져준다.

우리는 그걸로 축구를 했다. 작은 고무공이 있긴 했지만 가난한 시골에 그게 흔할 리 없고 돼지를 잡으면 돼지오줌보가 우리의 공이 되었다. 몇 번 안 차 터져 버리지만 마땅히 가지고 놀 거리도 없고 고무공이나마 귀하던 시절 돼지오줌보를 차며 놀던 기억이 새롭다.

한쪽 마당에선 동네 아낙들이 철질을 한다. 철을 서너 개씩 걸어놓고 전을 지진다. 전도 참 여러 가지다. 부잣집일수록 전이건 떡이건 넘쳐나게 되지만 가난한 집도 잔칫날만큼은 있는 거 없는 거 다 꺼내어 아끼지 않고 잔치 음식을 마련한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고 그야말로 시끌벅적 온 동네가 잔치 분위기로 충만하다.

술도 그 시절엔 다 집에서 빚어 잔치에 썼다. 부잣집은 잔치 한참 전에 쌀을 몇 섬씩 술을 빚어 삭히어 용수를 박아 동동주(맑은 술)를 떠냈다. 부잣집일수록 술은 미리 했다. 잔치 백일 전에 담아 삭히는 백일주란 것도 있었다. 뻑뻑한 막걸리도 쌀로만 빚으니 맛이 최고지만 그걸로 맑은 술을 떠내니 그 맛이 천하일미였다.

내가 어리던 시절 어느 동네에 잔치가 있는 날은 길가에 쓰러져 대자로 늘어진 어른들을 많이도 보았다. 배고프던 시절이었으니 이웃 동네잔치에 가서 부어라 마셔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인사불성이 되어 길가에 대자로 늘어지는 것이다. 어릴 땐 흰 두루마기를 입고 길가에 늘어진 어른들이 이상했으나 내가 어른이 되고 술을 좋아하다보니 그게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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