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유감(山情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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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유감(山情有感)
  • 김양순 수필가
  • 승인 2020.01.0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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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순 수필가

시작은 우연이다.

인생의 행로가 바뀌는 큰일도 그러하거니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도 우연에서 비롯된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약수터가 우리 동네에 있다. 그곳은 물통을 줄 세워 놓고 그늘에서 땀을 식히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

“물맛이 거기서 거기지 뭐, 날도 더운데 참 유난스럽다. 그냥 생수 배달해서 먹으면 편할 텐데…….” 하고 관심조차 없어했다. 그러던 초여름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다가 때마침 내린 소나기로 한층 더 싱그러워진 숲을 올려다보았다. 자꾸 보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곁눈질만 하던 곳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다니던 곳 인양 자연스럽게 발길이 옮겨졌다. 등산로 표시로 달아놓은 붉은 리본이 꽃처럼 고왔다. 조붓한 산길을 조금 올라가니 함초롬한 맥문동 꽃밭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듯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짙은 보랏빛 꽃을 손에 꽉 움켜쥐면 보라색 물감이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 꽃 몇 줄기 뽑으려고 오르다 시작한 등산이 요즘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되었다.

처음 며칠은 삼십 분, 그다음은 한 시간, 그러다 조금 더 멀리 그렇게 늘려간 거리가 대전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정상까지 오르게 되었다. 진득하지 못해서 작심하고 세운 계획도 며칠 못가서 포기하곤 했는데 이번엔 제법이다. 싫증을 내지 않으니 말이다. 집 가까이에 있어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긴 하다. 한여름에도 아름드리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숲에 들어서면 더위가 싹 가신다. 나뭇가지 사이를 뛰어 건너는 날쌘 돌이 청솔모, 차랑차랑한 매미소리, 수풀 사이의 다소곳한 풀꽃들, 짝사랑하듯 거친 소나무 둥치를 안고 오르는 담쟁이의 순애보, 솔향기, 바람소리 어느 것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이 없다. 시끌벅적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아랑곳없이 무더위 속에서도 자연은 묵묵히 자신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 일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싶어 한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깊은 그늘과 작은 벤치가 놓여있는 이곳은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비밀의 화원이다. 고즈넉한 숲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시간들이야말로 내 영혼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기억 저편의 시간들과 마주하며 토닥토닥 위로를 주고받는다.

삶의 터전을 통째로 옮긴 터라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기도 하지만 떠밀리듯 단체로 움직이는 여행이나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가다 보면 정작 내가 얻고자 했던 소중한 것들을 찾을 수 없다. 숲을 가르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아낌없이 부어주는 눈부신 햇살과도 눈맞춤을 할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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