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지용제를 다녀와서
詩끌벅적 정지용 문학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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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지용제를 다녀와서
詩끌벅적 정지용 문학축제
  • 옥천항수신문사
  • 승인 2016.04.0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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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순 수필가
수필시대 등단, 옥천문인협회 회원
▲ 김양순 수필가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오월의 아침, 맑은 하늘과 화사한 햇살이 더할 나위 없이 청량하다. 시나브로 번져가는 산과 들의 연초록이 가슴속까지 푸른 물을 들일 것도 같다. 제28회 지용문학축제, 해마다 오월중순이면 향수의 시인 정지용을 기리는 다채로운 행사가 생가일원에서 펼쳐진다.

축제를 여는 첫날은 지용신인문학상 시상식과 시비 제막식, 옥천군민이 하나가 되는 노래자랑과 향수 콘서트 등이 열렸고, 둘째 날은 문학 심포지엄, 청소년 문학캠프, 제28회 정지용 문학상 시상식을 비롯하여 시인과의 만남과 시노래 콘서트까지를 성황리에 마쳤다.

특히 올해는 문향 옥천군민의 오랜 염원이었을 정지용문학공원에서 열리는 행사이기에 더욱 뜻 깊다. 새로 조성된 3만9천여㎡ 넓은 면적에 주옥같은 시비가 세워져 있어 향수문학관과 육영수여사 생가와 더불어 또 하나의 옥천의 자랑거리가 될 것 같다.

고은 시인의 강의를 경청하지 못한 아쉬움은 음유시인이라는 정태춘 박은옥의 감성 짙은 목소리를 위안으로 삼았고, 올해의 지용문학상 수상 시인인 이근배 시인과 역대 수상 시인인 정희성, 도종환 시인의 마음이 시가 되고 시가 삶이 되는 이야기들은 다소 쌀쌀했던 봄밤을 포근함으로 채울 수 있었다.

오늘은 문학축제 중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지용백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시인의 모교인 죽향초등학교 운동장이 詩끌벅적(?)하다. 해를 더해갈수록 참가 인원도 늘어가고 응모작품의 수준도 높아져 명실상부한 전국 최고의 백일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한다.

아직 이른 아침,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로 차는 장난기 가득한 초등학생, 여드름 풋풋한 청소년들, 희끗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늦깎이 문학도들 모두 순진무구한 아이의 눈빛이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제목을 글을 지어야 하는 긴장감은 보이지 않는다.

욕심 없는 시인의 마음이 투영된 것이리라. 굳이 백일장이라는 이름으로 우열을 가리지 않아도 미명을 떨치고 새벽을 달려온 열정 하나로 그들은 이미 시인, 마음 푸른 사람들이 풀어놓은 달달한 詩의 향기가 개교 100년을 자랑하는 교정을 가득 채울 것이다 .

글제가 적힌 두루마리가 펴지고 "달력"이라고 쓴 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순간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뒷걸음질 친다. 새 달력을 얻으면 식구들의 생일과 꼭 기억해야 할 기념일에 동그라미를 치며 행복해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누런 양회 포대 대신 깨끗한 달력 종이로 싼 교과서를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일, 화장지는커녕 종이도 귀하던 시절 매일 한 장씩 떼어내는 얇은 달력 종이를 먼저 차지하려고 마렵지도 않은 뒤를 핑계로 동생과 다투던 일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그리운 날 그리운 사람들과의 이야기이다.

호기롭게 묵은 달력을 뜯어내고 새 달을 맞이할 때면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설렌다. 알뜰살뜰 규모 있는 시간을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때로는 무 토막 내듯 하루의 허리를 뚝 잘라 아무렇지 않게 휙 던져버린 날도 있었으리라. 젊은 날엔 젊음의 소중함을 모른다.

돈 주고 산 거 아니라고 헛되이 보내버린 날들이 왜 없었을까! 늦었지만,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과 자투리 시간도 소중하다는걸 깨달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곶감 꼬지에 곶감 빼먹듯 너무 쉽게 먹어치운 시간들과 화해하라는 의미로 오늘 글제를 ‘달력’으로 내놓았지 하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이려나?

옥천군과 옥천 문화원이 주관하는 지용제는 문학을 주제로 삼은 축제이기에 그 내용과 품격이 여느 축제와는 사뭇 다르다. 비단 위에 꽃을 더하듯 그림과 시가 어우러진 시화전과 시 낭송회, 공예품 전시회, 미술 전시회, 국악공연 등 문학과 예술이 축제의 중심에 있다. 잔물결 살랑대는 호숫가를 거닐며 시비에 새겨진 시를 읊조리는 낭만을 즐길 수도 있다.

시로 외워보라면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노래로 불러보라면 몇 번을 청해도 사양하지 않을 詩 鄕愁, 정겨운 노랫말과 감미로운 선율이 오월의 창공에 만국기처럼 나부낀다. 아름다운 옥천, 아늑하고 소박하기가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싶은 곳이다.

오월이면 어김없이 열리던 문학축제이지만 올해의 지용제가 내게는 아주 특별하다. 회원된 자격으로 옥천문인협회가 주관하는 시화전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었다. 짝사랑 하듯 문학의 언저리를 맴돌며 구애작전을 편 보람으로 생각한다. 그간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까 주저하다 수줍게 내민 짧은 글에, 고운 색과 향기를 입혀 귀한 작품들과 어깨 높이를 같게 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감동은 첫사랑의 추억처럼 영원할것 같다. 어느 영화제 수상 배우의 말처럼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인데 자꾸 자랑이 하고 싶어진다. 그걸 순수해서 그렇다고, 동심이 곧 시심이라고 우겨도 본다.

‘나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죽은 거만 못지않다’라는 워즈워드의 시처럼 내 마음도 그렇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는 한 톨의 씨앗도 마음 밭에 품을 수 없겠기에...

누군가에겐 노래가 되고 사랑이 되는 아름다운 시가 다른 누군가에겐 밥이 되고, 술이 되고, 그리움과 눈물도 되는 이 달콤한 비밀을 아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시를 낳는 일, 풀잎에 맺힌 이슬을 꿰듯 잡히지 않는 언어의 편린을 모으는 고통을 산고에 비유한 이도 있다.

망막에 맺히는 형상과 심연에 차오르는 느낌을 하나의 의미로 엮어내는 이를 시인이라 한다면 오늘은 나도 시인이고 싶다. 지친 어깨를 다독이는 손끝의 따스함과 마주 보며 나누는 미소의 다정함처럼, 삶이 고단한 이에게 용기가 되는 글의 힘으로 세상이 좀 더 따듯해 졌으면 좋겠다.

오늘은 3일간의 행복한 여정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날, 아직 몇 개의 일정이 더 남아있는 문학공원으로 가야겠다. 우선, 첫날부터 타고 싶었던 트랙터 마차로 구읍을 한 바퀴 돌아보고, 흥겨운 품바공연도 보고, 거리의 악사인 잉카의 후예들에게 ‘철새는 날아가고’ 그 곡도 청해 들어야 한다.

목로주점 투박한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도토리묵을 앞에 두고 마시는 막걸리 맛은 어떤 지도 알아볼 것이다. 그나저나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면 문학공원 제일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될 것 같다.

소쩍새 울음소리가 가장 가까이 들리는 곳에서 쏟아지는 별빛을 활짝연 가슴으로 받을 것이다. 모처럼 외출에 잘 차려입는다고 갖춰 신은 구두에 고생은 좀 하겠지만, 물안개 촉촉한 봄밤의 낭만을 덤으로 얻을 테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어쩌면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밤이 될지도 모를 그 밤이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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