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여사의 목련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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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여사의 목련은 어디에?
  • 박승룡논설위원
  • 승인 2016.04.14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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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옥천군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육영수 여사 생가에 궁금증이 밀려든다. 육 여사가 생전에 좋아 했던 목련나무가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목련만이 아니다. 수백 종에 달했던 각종 꽃과 집채만한 아름드리나무 등 고택과 함께한 역사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 생가는 지난 2011년 5월 복원돼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생가는 1600년대 정승을 지낸 김씨가 처음 지어 살았고, 이후 송 정승, 민 정승 등 3명의 정승이 살았던 집이라고 칭하면서 ‘삼정승집’이라 불렸다.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인 육종관씨가 1918년 민 정승의 자손에게서 사들여 수리하면서 조선후기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가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99칸 집이었다는 이야기처럼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 건넌채, 안채, 뒤채, 행랑, 별당, 후원, 정자, 연못 등이 모습을드러낸다. 수백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이곳은 안타깝게도 흔적으로만 만든 복원물만 덩그러니 있을 뿐 실제 모습은 찾기 힘들다.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인 이경령씨가 타고 다니던 옥천군 1호차 포니자동차, 닛산 화물차, 야마하의 오토바이 등 세월을 머금은 흔적들은 모두 다 외지로 나갔다. 이중 포니 자동차는 KBS방송국에 기증됐다.

이곳의 아름다운 무형 자원들은 육영수 여사 서거 전 1965년 현대건설이 개축을 위해 공사를 진행 하던 중 일부가 소실됐고, 이후 1999년에는 흉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육씨 문중의한 인사가 중장비를 동원에 철거하던 중 절반 가까이 훼손됐다.

마지막으로 2005년 복원사업을 하기 위해 발굴조사가 진행되면서 육영수 여사의 목련나무는 자취를 감췄다.

복원의 기본은 집터만 재건축하는 중요성보단 한 인물의 상징성이 짙은 무형적인 자원도 함께 복원되어야 진정한 복원이라 말할 수 있다. 육영수 여사는 생전 가곡 ‘목련화’를 즐겨 들을 정도로 목련을 사랑했다. 옥천군 육영수여사 추모제에서도 매행사 때 마다 ‘목련화’와 ‘고향의 봄’을 노래한다.

최근 ‘박근혜 효과’로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2015년 12월까지 30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생가에는 영국 대사관 외교관이 직접 본국의 장미나무를 공수해 선물을 할 정도로 육 여사의 아버지인 육종관씨는 나무와 꽃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하나하나 역사를 간직했던 나무들인 만큼 아쉬움도 크다. 수백 종의 아름다웠던 나무들은 무관심속에 사라져 간 것이다. 집터만 복원하는 것보다 그의 기본 정신을 복원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때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생가 복원 관련부서는 모든 행정력을 총 동원해 유출되었던 육 여사의 자산들을 모두 들여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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