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개월간 포로수용소 생활은 아비규환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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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개월간 포로수용소 생활은 아비규환 그 자체"
  • 천성남국장
  • 승인 2016.06.09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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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를 사수하라’ 명령 때 한국이 망한 줄 알았다”
6·25 참전국가 유공자 안남 분회장 최상덕(87·사진) 옹.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희미한 구들장 밑에 누워있었어요. 정신이 들면서 물이 먹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국군포로로 32개월간의 악몽을 겪었던 최상덕(87·사진)옹은 사지(死地)에서 깨어나던 그날을 회상하며 심한 몸서리를 쳤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에 의해 생사의 기로에 몰렸던 그날, 젊음을 저당잡혔던 당시를 회상하며 총탄과 포탄 속에 피비린내로 얼룩졌던 동족상잔의 비극인 민족의 잔혹했던 그 역사를 아직도 그는 잊을 수 없다.

청주 출신인 최 옹은 청년시절, 청년운동가로 청년방위대 감찰 역인 청주 청방감찰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대가족이었던 탓에 함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하고 홀로 피란길에 올랐던 그는 인민군과 마구 섞여 대전까지 피란을 내려갔다고 했다.

8월 18일, 대구 팔공산 꼭대기, 인민군들은 대구 시내에 박격포를 소나기처럼 내리 쏴댔다. 그러자 국군은 삼랑진에서 피란민을 막기 시작했다.

“대구를 사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최 옹은 “이제는 한국이 망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바로 그 때 나는 군 입대를 결정하고 참전을 했습니다.”

그는 바로 경북 영천의 당시 읍 소재지였던 신령전투에 참전을 하게 됐다. 유엔군이 “대구를 결사 방어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자 낙동강 인근, 대구 영천지역을 방어선으로 군사 훈련을 받았다.

“전우들이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어요. 숨 쉴 때마다 피가 분수 처럼 뿜어대는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했다고나 할까요, 아비규환이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꿈이라도 그렇게 무서울 수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죽어가던 한 전우가 “우리 집에 소식을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며 숨을 거둘 때 수습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섰던 그것이 마치 함께 죽음 속을 가는 듯 무서웠다고 회고했다.

“하나도 무서운 게 없었어요. 그때 군인정신이 들었어요. 겁나는 것 없이 치열한 전투를 맞으면서도 무섭지 않더군요. 목욕도 못하고 하니 여름이라 몸에는 이가 생겼어요. 접히는 곳이나 허리춤인 혁대에는 한웅 큼의 이가 기어 나왔어요. 거기다 온통 주변에는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아비규환이었어요.”

8월 18일~9월 18일, 인천상륙작전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도 소대장이 죽어도 시신을 수습할 만한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최 옹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제2의 6·25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온 나라가 죽음의 곡소리로 가득차고 떼죽음하는 젊은이들의 목숨이 온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그날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며 “지금 자라나는 세대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을 만들지 않도록 국가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국군도 중부전선으로 올라가기 시작함에 따라 충북 보은을 거쳐 미원~괴산~충주를 거쳐 밤 행군을 시작했다.

6사단(사단장 한병선) 2연대 1대대 4중대 소속이었던 최 옹은 “안동부터 하루 백리 이상을 걸었어요. 그러다 5분정도 쉴 때는 죽을 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어요. 발이 두 겹으로 부르터서 살 껍질이 다 벗겨졌어요. 앞에 가는 사람이 군인의 복장이 아닌 것 같아 당시 김세구 소대장님에게 언질을 주었어요. 소대장님이 확인을 해보니 머리 빡빡 깎은 인민군들이었어요. 정보기관이었던 한 사람이 급하게 전단을 써서 앞으로 전달하며 이 사실을 알렸어요. 5명 정도의 인민군이 사실을 눈치 채고 도망을 쳤어요.”

맥아더 장군과 이승만 박사가 북진을 명령하자 3·8선 경계선인 원산~평남 순천, 희천개천, 대평리까지 쳐올라갔던 국군은 7연대, 19연대는 보고 후 다시 내려갔으나, 2연대만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최 옹은 “낌새가 이상했어요. 압록강까지 갔을 때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 포위를 시작했고 잘 오던 저녁보급이 끊겨 이상했다”며 “포위망을 뚫고 희천개천에서 전투를 시작했고 평북 덕천에서 장비를 정리해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자연굴에 포위되고 말았다”라고 당시의 위급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군소재지였던 덕천에서 전투할 때 중공군과 국군의 식별이 불가능했어요. 살기 위해 총을 쏘았어요. 깜깜한 속에서 아군과 적을 구별하지 못하고 싸웠지요. 이때 아군도 많이 희생 됐어요. 후퇴를 거듭하다 숲속에서 갈잎을 뒤집어쓰고 3일을 숨어 있었어요. 이렇게 40일동안을 전투를 거듭하다 남쪽을 향해 걸었어요.”

최 옹은 “주로 큰 길에서 올라가는 산 속 화전민들에게 강냉이밥을 얻어먹고 찢어진 옷은 안 얼어 죽으려고 닥치는 대로 누더기를 걸쳐 입고 보통 영하 10~15도의 강추위 속에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며 “뒤에 매달렸던 배낭을 보니 총알이 6~7개가 박혀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평북과 평남의 중간인 자강도에서 32개월간의 포로 생활을 한 그는 “포로로 잡혔을때의 살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한 그것이었다. 노미를 들고 1m50㎝의 방공호를 파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노동과 생체실험 공포에 떨었고 포로들 50명을 집결시켜 놓고 죽지 않을만큼 두들겨 맞았다”며 “사료용 옥수수 26알을 식사로 주고 시신 파묻는 작업을 하는 등 막장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휴전협정이 조인됐을 때 그들은 포로들에게 사상교육을 진행했고 그를 통해 자술서를 쓰게 하는 등 악랄한 수법에 고통이 극에 달했다”며 “그 속에서도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내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준 당시 은인들을 찾아 인사하는 것이 소원이며 그 방향으로 절을 해서라도 꼭 은혜를 갚고 싶다”고 심경을 밝혔다.

최 옹은 “정부가 판문점에서 인민군포로 10명과 국군포로 1명을 교환하는 포로교환 조건심사로 조국으로 생환된 것은 지금도 꿈과 같다”며 “11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몸에 총탄이 박히지 않고 살아난 것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은 아닐까 늘 위로해본다”고 말했다.

끝으로 최 옹은 “고통을 못 이겨 정신줄을 놓았을 때 나를 구해준 북쪽의 은인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겁다”며 “이 나이 먹도록 또렷이 그 악몽을 기억하는 것은 6·25전쟁 같은 민족의 아픔이 다시는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일 것”이라고 밝혔다.

최 옹은 대학찰옥수수옥천군작목회장, 산악회인 청로요산회 회장과 마을 봉사활동에도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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