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청산군 한말의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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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청산군 한말의병 (1)
  • 전순표 시인·옥천향토전시관 명예관장
  • 승인 2020.02.20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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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있으면 3.1절이다. 우리는 일제의 강제병합과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국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난 독립투쟁으로 구한말의 구국투쟁인 의병운동과 3.1운동 독립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필자는 민족의 자존과 독립을 희생했던 옥천의 3.1운동을 살펴보았고 올해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구한말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한 옥천의 의병운동을 되돌아 보려한다.

 조선 말엽 국운이 쇠퇴하고 열강의 침탈이 가속화된 시기에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한말 의병은 발생 시기에 따라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을미의병(1차의병), 을사의병(2차의병), 정미의병(3차의병)으로 나눈다. 구한말 처음 의병 봉기는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촉발된 을미의병이며 1896~1897년 기간에 처음 의병이 일어났다. 이어서 을사늑약으로 1905~1906년 기간에 일어난 을사의병이 있다. 그리고 군대 해산으로 거센 저항과 무장투쟁이 일어난 정미의병은 1907~1910년 경술국치까지 의병봉기로 나눌 수 있다.

 을미의병(1차의병-1896~1897년) 발단과 제천의병 전개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직후 1895년 10월 8일에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동안 친러정책을 추진해온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배일감정이 격화되었다. 더욱이 김홍집 친일 내각이 12월 단발령을 내리자, 전국적으로 유림들의 의병봉기가 촉발되었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896년에 들어서자 유인석 문인들이 의병궐기를 알리는 격문이 각지에서 포고되었다. 2월 충청도 제천에서 화서학파 문인들이 주도로 인근 강원도 원주 등지의 의병이 일어나서 선봉장 유인석을 대장으로 한 호좌의병 부대를 만들어 충주 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15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된다.

 제천 의병대장은「격고팔도열읍」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으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이도다. 옛날 고구려가 하구려(下句麗)로 된 것도 오히려 수치라 이르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나라로서 소일본이 된다면 얼마나 서러운 일이겠는가! ~<중략>~ 을미 12월 충청도 제천의병장 유인석 삼가 격서를 보내노라!” 격문을 전국 유림에 띠웠다.

 한편 1896년 2월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아관파천한 후에 의병해산에 대한조칙을 반포하여 해산을 촉구하였다. 친일 내각의 몰락으로 교체된 친 러시아 정권은 민심수습차원에서 단발령을 철회하고 각 지방에 선유위원을 파견, 의병 해산에 주력하게 되었다. 류인석 의병은 3월 중순 충주 전투에서 제천으로 후퇴하며 또다시 명운을 건 대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때 이인영, 한동직 원주의병, 이강년 문경의병, 영춘 권경선, 횡성 이명노 부대가 합세해와 3개월간 제천성에서 버티다 단양으로 퇴각한 유인석 의병대는 소극적으로 대항하면서 전열정비를 하며 부대 재편성을 하는 한편 지역 고지대 유리한 산악 지형을 이용하여 장기전에 들어갔다. 이후 유인석 의병부대는 북상하여 강원도와 평안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옮겼다.

 한편 옥천과 근접한 옥천·영동의 유림 층에 많은 영향을 주던 대전 회덕 유림 층의 움직임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충청도 회덕에서도 의병운동이 일어나 공주 출신 문석봉 의병장의 창의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세력은 회덕의 유림들 이었다. 대전 회덕은 송시열, 송준길 이래로 노론의 중심이었고, 이 당시 유림의 대표 격인 송시열의 8대손 송근수와 신응조는 반양, 반위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론자로 문석봉 의병대 등을 적극 지원하는 바람에 이 지역 의병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등등했다.

 1895년부터 1896년 2년간에 걸쳐 처음 거병한 을미의병은 조선의 사대부층인 지방유림과 양반들이 나서 주도했다. 그러나 차츰 그들이 제거되면서 평민과 동학도들이 가세하는 양상이 바뀌어갔다. 이 당시 의병운동과 관련하여「안사람 의병가」와「의병군가」가 백성들 사이에 불렸다.

「안사람 의병가」는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 찾기에 힘쓰는데 ~<중략>~ 의병들을 도와주세”는 「의병 군가」의 가사는 “내 집 없어, 서러워라 나라 없어 서러워라. 임금 섬겨 나라 찾고, 왜놈 잡아 임금 앞에 꿇어 앉혀, 우리 임금 분을 풀어주세”란 가사로 일본을 물리쳐 조선을 되찾자“는 의미가 깊은 군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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