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필가는 그리움을 선으로 그린다고 했다. 실체가 없는 그리움을 선으로 그린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모르지만, 나도 그처럼 그리움을 선으로 그려보고 싶다.
지난해에 우리 교회에 미술반이 생겼다. 홍대 대학원을 나와 미술계에서는 알아주는 선생님이다. 미술반이 생긴다는 소식에 가슴이 뛰었다. 어려서 가장 좋아하던 과목이다. 연필도 잡을 줄 모르면서 용기를 내어 지원했다. 지금까지 먹고 살기에 급급해 꿈도 못 꾸었는데 이제라도 꿈을 실현해보고 싶었다. 매주 안식일이면 파주에 있는 선생님의 화실에 모여 그리기 공부를 했다. 다양한 연령대 중 내가 최고령이다.
나는 나이도 많은 데다 실력까지 없으니 무조건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화실에서는 선생님이 지정해주는 사진을 보면서 그렸고, 집에서는 내가 찍은 사진이나 인터넷에서 마음에 드는 풍경을 다운로드하여 무조건 그렸다. 나무 한 그루를 그리는데도 지우기를 수없이 했지만, 자연스러운 선이 나오지 않았다.
드로잉의 기본은 명암이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어두움과 밝음을 잘 표현해야만 작품이 된다. 그러니 왕초보가 어찌 연필 하나로 실물을 실물답게 그릴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풀기 어려운 숙제요, 능력 밖이란 생각에 그만두고 싶은 때도 많았다.
하지만 버킷리스트 중의 으뜸이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차츰 사물을 보는 눈도 조금씩 달라졌다. 길을 가다가도 저것을? 아니 이것을? 하는 생각으로 보게 된다. 그럴 때면 사진을 찍어가지고 와서 습작을 했다. 그런데 이게 여간 재미있는 게 아니다. 실력이야 초등생만도 못하지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면 한 편의 글을 썼을 때처럼 뜨거운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그렇게 시작한 지 팔주 만에 반생들이 자연 풍광을 화폭에 담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안고 봄맞이에 나섰다. 열세 명이 승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도착한 곳은 울산바위가 가장 가깝게 잘 보이는 골프 앤 리조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너른 거실 창으로 장엄한 울산바위가 바짝 다가선다. 희끗희끗 눈에 쌓여있는 울산바위가 얼마나 우리를 황홀하게 하던지, 모두 베란다로 나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사이 벅찬 가슴을 화폭에 담는 이도 있었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양양 쏠비치 앞 바닷가로 나갔다. 데크에 일 열로 기대서서 바위와 바다를 스케치하는 모습은 어느 화가 못지않게 진지했다. 나는 사진을 보고 그릴 때와 달리 실물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엄두도 못 내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저 설레는 벅찬 가슴만 쿵쿵 뛸 뿐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세밀하게 보는 눈과 구성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기본기도 터득하지 못한 나는 그리다가 마무리도 못한 채 사진만 찍어가지고 돌아섰다.
그동안 안식일이면 아침에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면서도 재미에 빠져 피곤한 줄 몰랐다. 시간만 나면 글쓰기는 접어두고 그림 그리기에만 열중했다. 어느 날은 그리기에 몰두하다가 아침을 맞은 적도 있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은 밤을 새워도 힘이 들지 않았다. 스케치북 대여섯 권을 소비하고 나니 조금씩 터득이 되어간다.
설악산을 다녀와서 울산바위와 그곳 풍경들을 여섯 점 그렸다. 작품이라고 말하기에는 얼굴 붉어지는 일이지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지 22주 만에 교회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물론 선생님의 보정으로 작품을 완성했지만 반응은 엄청 좋았다.
내가 수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순을 지나서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같이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노력하다 보니 성취감도 따랐다. 그동안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수필집 두 권을 낸 것도 도전했기 때문에 이룬 결과물이다. 글자로 생각이나 사고를 표현하듯, 이제는 가슴에 도사리고 있는 그리움을 선으로 그려서 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