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왕(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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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왕(11)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0.04.0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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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임 수필가
지옥임 수필가

 

중종과 조광조는 신하와 임금 사이를 넘은 동지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조광조의 분명한 사리판단과 절도 있는 행동, 눈치를 살피지 않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조광조는 과거시험을 치를 때 학문에만 열중하는 사람보다는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두루 갖춘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했다.


중종은 매사에 빈틈이 없고 완벽한 조광조를 무척 좋아했다. 조광조의 강압적인 정치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가는 압박에 중종은 숨통이 막힐 것 같았다.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이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는 것을 이용해 조정중신들은 조광조를 없애라고 상소문을 올린다. 훈구세력들은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이용해 나뭇잎사건을 일으킨다.


나뭇잎에다 과일즙으로(주초위왕 走肖爲王) 써놓고 벌레들이 갉아 먹게 한 다음 왕에게 갖다 바치니 주초는 조를 불리한 글자이므로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라고 조광조를 음해한다. 신하들의 모함으로 얼룩진 기묘사화(나뭇잎사건)가 일어나 독선적이지만 충신이었던 조광조가 후궁들의 득세로 인하여 피해를 본다. 조광조와 신진세력들이 물러나 유배길에 나선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들이 반대하고 나선다.


왕의 자녀들
조선시대 27명의 왕들에서 아들 137명, 딸 105명 모두 242명을 두었다. 왕 1인당 평균 8.9명, 남 5명, 여 3.9명, 왕들 중 자녀를 제일 많이 둔 왕은 3대 왕 태종으로 12남 17녀를 두었다. 아들을 제일 많이 둔 사람은 4대 왕 세종임금으로 18남을 두었다. 자녀를 두지 못한 왕으로는 단종, 인종, 경종, 순종 등 4명이 있다.


자녀를 제일 많이 둔 왕
태종(방원)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황후 한 씨 사이에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34세에 조선의 3대 왕으로 등극, 17년 10개월 동안 권자에 있었다. 태종(방원)비는 민제의 딸 원경황후 민 씨이다. 태종대왕은 12남 17녀를 두었다. 1418년 52세에 셋째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2년 뒤 태종은 56세에 세상을 뜬다.


태종(방원)은 1383년(고려 우왕 9) 16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 대사언을 지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하자 먼저 정몽주 일당을 제거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조선의 개국에 크게 기여했다. 태조 1년에 정안군에 봉해졌지만 재상중심의 재상체제를 강화하려는 정도전 등의 강한 견제를 받아 세자책봉에서 탈락했다.


1398년에 정도전이 태종의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없애려 하자 태종(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과 세자로 책봉된 태조의 7째 아들, 계비 강 씨의 아들 방석을 죽였다. 그리고 아버지 태조(이성계)를 왕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둘째형인 정종(이방과)을 왕으로 추대한다. 이방원 자신은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의 관직을 겸직하고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다. 1차 난을 일명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당의 권력다툼이기도 하다.


정종 2년에 4째 아들 방간과 박포 등이 중심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방원(태종)은 2차 왕자 난을 진압하며 권력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한 후 세자로 책봉된다. 그 해 4월에 왕과 세제의 친위대를 제외한 모든 사병을 없애는 한편, 지방에도 절도사를 없애고 그 소속 군사를 모두 삼군부에 편입하여 병권을 왕에게 집중시켰다. 방원(태종)은 정종의 양위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2차 왕자 난을 일명 방간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도 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세력구조는 이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이들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조선 건국 초기에 조선은 도읍(수도)을 3번이나 옮긴다. 태조 3년 이성계가 개경이 기운을 다했다 해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1차 왕자 난 이후 정종 원년에 이방원이 다시 개경으로 도읍을 옮겨간다. 2차 왕자 난이 있은 뒤 태종(이방원)이 등극하면서 다시 도읍(수도)을 한양으로 옮겨온다.


이방원(태종)은 의혹만큼이나 많은 개혁을 했다. 세제시절에 신문고를 설치했다. 왕위에 오르면서 불교 법을 폐지하고(숭유억불정책) 비구니를 환속시키고 연등제(초파일)를 폐지하고 유교를 장려했다.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하였다. (단군 승격) (호구법, 인원파악) 화폐, 태종 원년에는 종이돈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 가로 48cm 세로 42cm로 매우 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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