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왕(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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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왕(12)
  • 지옥임 수필가
  • 승인 2020.04.0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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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 화폐를 신뢰하지 않아 1년 5개월 만에 물품화폐 유통제로 돌아왔다. 그리고 12년 만에 다시 화폐를 허용했지만 완전 실패를 하고 세종대에 가서 다시 동전 조선통보가 나왔다. 이처럼 많은 개혁을 했다. 그리하여 세종 대에 많을 발전을 하게 된다. 태종은 17년 10개월 왕의 자리를 지키다가 52세에 셋째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6세에 세상을 뜬다.


아버지 태종은 세종을 많이 아끼고 사랑했다. 세종 4년까지는 태종이 상왕으로 생존해 많은 영향을 주었다. 태종은 후계자 문제에 대해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자손만대 후손들에게 왕 중에 제일이라고 손꼽히는 세종에게 양위하였으니 말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남긴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잘못된 모든 것은 내가 지고 갈 테니 너는 선군의 길을 가거라)


세종대왕의 제일 큰 업적은 훈민정음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혼자서 극비리에 만들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소문이라도 나면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감안해 집현전 학자들도 몰랐다고 한다.


한글에 대한 최만리의 반대 상소문을 보면
1. 첫째 중국의 비난을 받을 것이요.
2. 둘째 중국의 문자를 두고 훈민정음을 쓰면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것이다.
3. 셋째 설총의 이두로서 굳이 훈민정음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4. 넷째 훈민정음 보급으로 억울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두란 정도나 알고 있는 중국 사람들


만약 훈민정음이 나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사대부들이 반대하고 즉각 중국에다 상소를 올려 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최만리의 반대가 가장 심했다. 세종은 세자 문종에게 정사를 맡기고 왕자들과 측근들도 알지 못하게 은밀하고 조용하게 언문 28자의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6년 동안 혼자서 열중했다.


훈민정음이 완성되었을 때 기습적으로 발표를 했다. 이때 집현전 학자들과 대신들도 반발이 대단했다. 세종의 훈민정음을 지지한 사람은 언어학자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이선로, 이개 등이었다. 세종시대를 빛낸 사람들은 황희와 맹사성이다.


후사가 없는 왕들
조선왕조 27명의 왕 중 자녀가 없는 왕은 6대왕 단종, 12대왕 인종, 20대왕 경종, 27대왕 순종 등 4명이다.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해 이유를 들라고 한다면 단종은 수양대군에 의해 후사 같은 것은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종의 경우에는 계모 문정왕후 때문에 후사를 두는 것이 어쩌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종 같은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20대 왕인 경종은 숙종의 장자로 어머니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장옥정(소의 장씨)이 왕자 윤(경종)을 낳자 숙종은 5일 만에 윤(경종)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 씨를 빈으로 승격시킨다.


경종이 태어났을 당시 숙종은 남인 서인과의 갈등 속에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에 태어난 지 겨우 100일 된 아기를 원자로 책봉한다. 3살 때 세자에 책봉, 세자재위 기간 30년, 숙종이 죽자 왕위에 오른 경종의 재위 기간은 4년 2개월,​ 37세에 세상을 뜬다.


소의 장(희빈)씨가 회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현왕후 민 씨가 탕약을 보낸다. 소의 장씨는 중전 민씨 인현왕후가 독약을 보냈다고 모함한다. 예의 바르고 덕성이 높은 중전 인현왕후의 생신날 희빈 장씨의 모함이 절정에 이른다. 머리가 비상한 장씨는 미리 준비하고 계획을 짜놓고 있다가 죽은 개를 숙종에게 보여주며 고해바친다. 생일날이라고 인현왕후가 보내온 음식을 꺼림칙하여 개에게 주었더니 독이 들어 있어 개가 죽었다고 모함을 한다. 덧붙여 생일 문안을 갔더니 받아 주지 않았다고 이간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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