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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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
  • 우중화시인
  • 승인 2020.05.1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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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화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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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에서 여주인공인 ‘샹탈’의 독백이다. 장 마르크보다는 네 살 위인 그녀는 뜨거운 사랑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뜨거웠던 사랑은 점점 불안한 우울감으로 빠지게 된다. 어느 날 문득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라고 전혀 의도치 않게 권태롭다는 듯이 혼잣말을 하게 된다. 샹탈이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이 말은 여성성의 상실을 말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실존의식을 재발견하게 되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그 이후 샹탈에게 익명의 편지가 도착한다. 발신자는 장난스럽지 않으며 정중하게 그녀를 찬양한다. 무시하려던 그녀도 두 번째 편지를 받고서는 마음을 달리한다. 자신을 지켜보는 어떤 이가 존재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완전히 새롭게 변해간다. 권태라는 단어가 무색해 질만큼 다시 활기를 찾는다. 그 편지는 사실 장-마르크가 '시라노'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여인 샹탈을 향해 가상으로 쓴 것이다.


그 익명의 편지는 다시 여인의 붉음을 찾게 해준다. 붉은색 옷을 경멸하던 여자에서 붉은색 옷을 좋아하는 여자로. ‘수줍음이 되살아나자 그녀는 다시 얼굴을 붉히는 법을 배운 것이다.’라는 문장 한 구절은 잃어버리려 하는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실존을 다시 알게 하는 시간들이 되어준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나이를 먹게 되고 육체의 노화는 점점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타인이 보내는 긍정의 시선 없이 노화되어 간다면 언젠가 우리가 살아갈 원동력이 되는 자긍심은 우리 안에서 연기처럼 서서히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우울감은 현대인에게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어떤 상태다. 근대 이전만 해도 권태와 우울감이라는 용어는 다소 어색한 감정표현 이였다. 그 시절은 대가족 형태로 일을 하거나 여러 명의 가족 단위로 대화를 나눔으로 권태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말하자면 권태와 우울감은 여유와 연대해체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여유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어서 근대 이전에 비해 조금은 편리성에서 여유로워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 나타나는 또 다른 병적 현상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고립을 두려워하고 타인의 관심을 갈구한다. 타인이 없이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관심이 끊어질 때,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사라질 때 결국 내면의 자긍심이 서서히 사라지게 되면서 정체성 또한 흔들리게 된다. SNS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놓는 이유도 어쩌면 현시대에 타인의 관심을 요구하는 가장 보편의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관계 맺음에서 성공적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누구도 그러한 성공적인 관계들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들이 함께하는 공동체 속에는 너무도 다양한 성향들이 존재하고 그렇게 딱 코드가 맞는 관계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코드가 잘 맞는 사람과 만났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권태로움 즉 매너리즘에 빠지는 시간들은 늘 우리 삶 가운데 존재한다. <밀란 쿤데라>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서로를 다시 주목하는 것이라고, 시간 속에서 변화된 것들까지도. 나아가 서로를 숭배하면서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이 새롭게 와 닿는다.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다른 어떤 것들이 끼어들까 봐.’


점점 초록이 짙어진다. 오월은 코로나 사태가 줄어들면서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적 거리두기’로 바뀌었다. 또 다른 계절의 시작, 모쪼록 자긍심을 찾아주는 서로의 계절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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