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풍(擧風)이 이는 봄에 기대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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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풍(擧風)이 이는 봄에 기대어(1)
  • 임난숙 둔포중학교 교사
  • 승인 2020.05.21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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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난숙둔포중학교교사
임난숙둔포중학교교사

 

바람 한 줄 없이 햇빛만 푸진 봄. 모처럼 창문 활짝 열어 집안 구석구석 햇빛이 들어오는 길을 닦아 놓고 이불이며 장롱 속 옷가지마다 봄을 만나게 하였다. 이불을 털며 묵은 겨울을 보내고 새 봄을 덧입히는 ‘거풍(擧風)’. 묵은 먼지가 어찌나 많던지 털어도 털어도 끝이 없었다. 얼마나 털었을까, 사라지는 먼지 사이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그리고 그 너머로 먼발치 봄 언덕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봄 언덕을 넘어오는 기억이 보였다. 숨 멎게 만드는 기억 하나, 수십 년 삶을 거풍한 ‘그리움’이었다. 하늘을 올려 보기보다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서로의 꿈을 듣고 키워 주던 시절, 나에게 하늘을 올려 보게 하는 새로운 습관을 갖게 해 주신 ‘김무봉 선생님’.


교생실습을 나오신 선생님으로 시골 중학생들의 한 달은 그저 설레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국어 교과를 좋아했던 소녀들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그중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덧 국어 시간은 교과서 밖 선생님의 이야기를 더 기다리는 마력(魔力)의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가을빛이 절정에 달하던 어느 날, 선생님으로 하여금 대학교에 대한 동경이 사무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선생님이 꿈이던 나였지만,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을 알고 있기에 마음으로만 꿈꾸던 대학교. 꿈과 현실의 멀어짐을 느끼던 시기에 대학생 선생님은 가슴 설레는 갈등을 일으키게 하신 것이다. 어쩔 땐 선생님의 모습에 미래의 내 모습을 겹치기 하여 교단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섬뜩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은 야속하게도 어쩜 그리 정확하게 흐르던지, 선생님과의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만남의 기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꿈 많은 소녀들의 가슴을 맑고 고운 하늘빛으로 물들이신 선생님을 떠나보내기 싫은 서운함에 마냥 먹먹하였다. 마지막 수업. 선생님은 칠판에 미당 서정주님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란 시를 적어 주셨다. 속으로 읽고 또 읽고를 몇 번 하다 보니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은 나에게 또 다른 ‘그리움’을 품게 했던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는 나만의 ‘만남의 방식’을 갖게 했다고나 할까?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젊은 선생님의 푸른 목소리는 그렇게 열여섯 소녀의 가슴에 시화(詩化)되어 세월 따라 흘렀다. 가을꽃이 피고 지기를 수십 년 돌아 나온 날, ‘그리운 사람’ 되어 ‘푸르른 하늘’에 떠오른 그 시절 ‘젊은 선생님’이 기억 아닌 현실 속으로 걸어오셨다. 선생님의 모습에 내 모습을 겹치기 하던 소녀가 정말로 선생님이 되어 ‘선생님의 자리’에 서게 된 지 십여 년이 흐른 어느 날, 관내 대학교에서 ‘대학입학사정관제 설명회’가 있었는데 강사 이름을 보니 긴 세월 잊지 않고 그리워하던 선생님과 같은 이름이었다.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어 갈 수 없는 관계로 인근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그 강사분이 나의 선생님인지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확인 전화를 기다리던 그날은 시간이 멈춘 듯 길기만 했다. 그러던 중 일과를 마치는 시간에 내 부탁을 받은 선생님으로부터 ‘맞다’는 전화가 왔다. 순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기쁨에 벅차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저녁 내내 오래된 기억 속을 헤맸다. 기억이 사라질까 봐 추억하고 다시 추억하던 숱한 시간이 오늘 같은 기쁨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스스로 칭찬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혹시, 임난숙 선생? 김무봉이에요.” 전화기로 들리는 목소리는 여전한 ‘젊은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눈물 핑 도는 어지러움 가다듬으며 이어가는 대화 사이로 오래 전 가을 기억이 무더기무더기 가을꽃으로 피어났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는 나만의 ‘만남의 방식’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선생님을 다시 뵌 건 그해 겨울이었다. 오랜만에 가방에 그리움 한가득 담아 꺼내 풀어 보면서 올라가는 서울행 열차 안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승객들로 붐볐으나 그 어느 누구도 나의 행복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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