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용이 정지용에게 사준 타고르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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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용이 정지용에게 사준 타고르 시집
  • 김묘순 문학평론가
  • 승인 2020.06.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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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순문학평론가
김묘순문학평론가

사소한 것, 아주 사소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지구를 움직이고, 우주의 기운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물론 사소한 모든 것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칫 사소하다고 그냥 지나치는 것 또는 지나칠 수 있는 것이 가끔 아주 중요하고 귀중한 요인으로 작용 된다.


정지용은 타고르의 문학에 심취하였던 적(1923년 1월 휘문 창간호에 타고르의 ‘신에게 바치는 노래’인 「기탄잘리」를 「탠잴리」로 번역하여 발표하나, 같은 해 3월 김 억에 의해 기탄잘리 완역본이 나오게 되어 정지용의 타고르시집 번역은 여기서 멈추게 된 것으로 보이며, 타고르의 시풍을 닮은 「풍랑몽1」을 씀)이 있었다.


정지용의 타고르에 대한 심취는 휘문고보 3년 선배인 홍사용이 정지용에게 타고르 시집을 사주면서 비롯되었다. 즉, 휘문고보를 다닐 때 정지용은 타고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문단에 <월탄문학상>이 창설될 당시 휘문고교에도 재학생에게 주는 <월탄문학상>이 창설되어 매년 시상되고 있다. 1978년 휘문고등학교가 종로구 원서동 교정(現 현대건설 사옥의 자리)에서 강남구 대치동으로 옮겨간 후, 처음 시상되는 <월탄문학상> 시상식이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종화, 이선근 등의 선배들은 재학생 대표들과의 간담회 석상에서 회고담을 다음과 같이 늘어놓는다.


홍사용은 휘문고보 후배들의 문예활동을 위한 모임에 거의 참석하여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장본인이다. 그 한 예로 5년 후배인 조택원에게 시, 연극, 춤에 관심을 갖도록 했을 뿐 아니라, 재정적인 도움까지 주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러면서도, 토월회의 실질적인 재정적 후원자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정지용에게 타고르의 각종 시집을 사주며 읽도록 하여 문학에의 開眼을 하게 한 선배였다.


“문학에의 開眼”.
물론 모든 사람에게 책 한 권으로 “문학에의 開眼”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사람에 따라 특수한 환경이나 처지에 놓이게 되면 획득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에 목마르고 그 문학을 향한 자료적 갈증에 시달릴 때 타고르의 시집은 정지용에게 도착하였다. 타고르 시집은 정지용의 정수리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줬을지도 모른다. 그 충격은 정지용에게 타고르에 심취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정지용의 「趙澤元舞踊에 關한 것」(- 그의 渡美公演을 契機로 -)을 살펴보면, 실제로 그는 “타고르의 시에 미쳤”다고 고백한다.


澤元이가 徽文中學 三學年때 나는 五學年이었었다. 그러고도 한 집에서 한 방을 썼고 한 상의 밥을 먹었다. 澤元이는 庭球 前衛選手로 날리었고 나는 印度 「타고르」의 시에 미쳤던 것이다.


性味가 맞아서가 아니라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이 때까지 밉지 않은 친구다.


- 정지용, 「趙澤元舞踊에 關한 것」 - 그의 渡美公演을 契機로 -, 散文, 동지사, 1949, 225면.


정지용은 2년 후배인 무용가 조택원과 “한 집에서 한 방을 썼고 한 상의 밥을 먹”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휘문고보 시절 조택원과 같이 숙식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 정지용과 무용가 조택원.


그들에게 책 한 권과 사소한 재정적 지원 그리고 그들을 향한 홍사용의 응원은 한국현대문학과 현대무용의 한 획을 그었다. 만일 홍사용의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지원이 없었더라면 정지용은 어떠한 시풍을 구사하였을까?


어차피 항아리는 흙으로 빚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정지용은 시인으로서 한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었다고 말할 것인가?


사소하였을 것이 커다란 고마움으로 가득 내려앉는다. 먼동이 터오고 있다. 누군가에게 홍사용 같은 존재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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