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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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무신
  • 강병철 수필가
  • 승인 2020.09.0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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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수필가
강병철 수필가

 

 

선생님들은 목요일 방과후마다 면사무소나 지서 직원들을 불러 배구 시합을 벌이곤 했다. 우리 조무래기들이 책보를 깔고 끼리끼리 웅크려 앉아 구경을 하다 보면 태양이 중천에서 허리를 휘청 꺾는 것이다. 저마다 배구공 심부름꾼을 자처했는데 빗나간 공이 내게로 튕겨오길 조마조마 기다리곤 했다.

9인조 극동식 시스템은 세 명의 스승이 거의 종횡무진 독무대였고 나머지 스승들은 대개 그냥 서 있었다. 상대 네트에서 날아온 공을 박성섭 선생님이 받았고 강희묵 선생님이 토스 하면 좌측 날개 공격수인 김동배 선생님이 강 스파이크를 날리는 게가 공식이었다. 늙은 스승 중 특히 셋째줄 양 구석의 포지션들은 전봇대처럼 멍 하니 서 있다가 느닷없이 떨어지는 공을 향해 얼떨결의 헛손질로 핀잔을 먹곤 했다.

나는 진주강씨라서 강희묵 선생님을 응원했는데 동급생 김민수는 김동배 선생님의 돌고래 점프와 함께 스파이크가 터질 때마다.

역시 김해김씨가 최고얏.”

가랑이에 손가락 깍지를 끼고 팔짝팔짝 뛰었다. 김 선생님은 스파이크 성공 후 민수 앞에 오똑 서서 손가락질로.

나는 안동 김씨야. 임마.”

한마디 던진 후 덤블링 뒤집기 재주를 넘어서 우리들을 황홀하게 했다.

뉘엿뉘엿 늘이는 땅거미를 밟으며 귀갓길 책보자기를 싸다보면 허기진 공복이 밀려오기도 했다. 5번 박정희 후보와 2번 윤보선 후보 그리고 1번 이세진 후보와 4번 서민호 후보의 선거벽보가 공회당 담벼락과 기와집 바깥마당 마루에 붙어있던 시국이다 .

빙철이 너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 같니?”

가리방을 넣기 위해 허리 숙이는 스승의 어깨를 지난 노을이 운동장까지 새빨갛게 잡아먹었다. 문득 선글라스 장군 출신 그 사람이 국수라도 배불리 먹게 해준 거라는 아버지 말씀이 선뜻 기억나서.

박정희.....?

그러다가.

"몰르겄슈.”

설레설레 흔들었다. 백화산을 덮은 저녁놀이 복도 신발장까지 새빨간 물감으로 칠해놓았다. “낙권이 너는?”

윤보선유.”

그의 짙은 입술도 검붉게 번득거렸다. 낙권이네는 장금내와 청금산 지나 한 시간이 걸렸으니 왕복으로 꼬박 두 시간이었다.

그 먼 거리를 물 건너 해안선 지나 징검다리 건너 꾸역꾸역 놀러가는 것이다. 마루 밑에 방공호처럼 파놓은 생강굴이 있었다. 아들 4형제가 빵틀에서 찍어낸 듯 비슷비슷 생김새라서 신작로에서 부딪쳐도 그들 형제를 딱 찍어낼 수 있었다. 누에를 키우는 그의 사랑방 모서리에는 우등상이나 웅변대회 상장들이 밥풀떼기로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 모퉁이에서 임창 만화 떙이와 영화감독에 빠지다 보면 누에들의 뽕잎 먹으며 싸락눈 쏟아지듯 빠샤삭뺘샤삭 소리를 냈다. 밀기울은 아귀통이 어석거리게 씹어도 껌이 되지 않았고 조약돌은 냇물에 파묻고 새도록 기다려도 비누가 되지 않았다.

밥 먹을리? 근양 갈리?”

낙권이 어머니가 흔드는 부지깽이 너머로 썩은새 같은 어둠이 몰려오는 중이었다. 한머리까지 또 한 시간을 걸어가서 쥐꼬리 자르기를 마쳐야 잠이 들 참이다. 어둠이 팽나무를 칭칭 감으면 서낭당 언덕길로 처녀귀신이 길을 막을 게 뻔하다. 우지끈뚝딱. 까마귀 날자 삭정이 떨어지는 소리가 그 예고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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