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임금을 섬길 수 없었던 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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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임금을 섬길 수 없었던 충정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09.1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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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을 향한 변함없는 충심, 백촌 김문기
지난 해 3월 충의사에서 백촌 김문기 선생을 기리는 추모제향제 모습
지난 해 3월 충의사에서 백촌 김문기 선생을 기리는 추모제향제 모습

 

조선 7대 왕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았을 때 수많은 사람이 대세인 세조의 편에 섰음에도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듯이 한 나라에 왕이 두 명일 수 없다.”며 폐위된 단종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예로 단종에 대한 충정을 맹세하고 관직을 내려놓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던 생육신과 죽음도 불사하며 단종 복위 운동을 진행했던 사육신이 있다. 특히 사육신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했던 백촌 김문기 선생은 옥천군 이원면 출신으로 옥천 군민에게 자부심과 교훈을 심어주는 존재다.

김문기 선생은 단지 충심만 가득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1426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부친의 삼년상을 치러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 또한, 그는 문무에 뛰어났고 청렴한 성품을 가져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아 1430년부터 예문관검열, 함길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후 현재의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등의 장관이라고 볼 수 있는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1453년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상왕으로 세운 후 자신이 왕의 자리에 앉자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밀고자 김질에 의해 복위운동이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은 채 단종에 대한 충심을 보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왕조실록 공개 전 남효온의 추강전-육신전에 따라 사육신이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유응부·하위지라고 알려지며 그가 보여준 충심은 세상에서 잊혀 가는 듯했다. 하지만 1977, 김문기 선생이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주장이 후대에 의해 제기됐다. 이 주장은 당시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서울시,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등은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으로 현창하며 결론지었다. 당시 김문기 선생과 유응부 선생의 자손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사육신 묘에 김문기 선생의 가묘를 만들어 배향하며 종결됐다. 사육신 묘에 일곱명이 안장되어 있는 셈이다.

김녕김씨 충의공파 대종회에서는 김문기 선생의 충심과 효심을 본받고자 이원면 백지리에 충의사를 짓고 선생의 영정을 봉안했고 충의사에서는 매년 봄 옥천군청, 옥천문화원이 주최하는 제사 춘향제가 열린다.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잊히지 않고 내려온 백촌 김문기 선생의 고고한 학과도 같은 충심, 관직도 미룰 정도의 효심은 옥천군민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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