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목민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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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과 국가를 위하는 목민관의 삶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09.24 11: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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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정립 선생
고암 정립 선생의 교지, 교첩, 개명첩 등
고암 정립 선생의 교지, 교첩, 개명첩 등

 

고암 정립 선생은 1554,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고암 선생의 문집 고암유고에 따르면 선생은 어릴 적부터 책을 읽으며 대의에 통하였고 한 번 열람하면 곧 기억했다고 전해진다. 11세가 되던 해 선생은 어린 나이에 청산 향시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다. 선생은 15세부터 20세까지 주로 옥천의 금천사와 옥천향교를 오가며 공부를 지속했다. 10대 후반부터 10여 년간 이미 여러 지역의 생원시, 별시, 진사 초시 등에 합격한 선생은 26세가 되던 해 진사가 되어 옥주 사마소에서 강신례를 올린다. 이듬해엔 중봉 조헌에게 중용과 대학을 사사받는다. 선생은 62세라는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후 그해 12월 성균관학유로 출사하여 79세까지 진해 현감, 경상도사, 성균사예, 군자감정, 판사직 등을 수행한다. 79세에 선생은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낙향해 자신의 삼락재에서 제자들에게 강론하며 성리학에 대해 제자들과 질의, 토론을 진행하곤 했다.

고암 선생은 엄하고 과묵했으며 곧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62세의 늦은 나이에 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욕 없이 백성을 위한 목민관으로 직분을 다했다. 유학의 근본이념에 따라 군신, 부자간 도리를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쳤다. 진해 현감으로 재직할 때 임진왜란 후 피폐해진 고을 백성을 위해 구휼에 힘썼다. 선생이 고향에 낙향한 후, 진해 현 백성들은 그를 기념하기 위해 정립현감 송덕비를 세웠을 정도로 본이 되는 벼슬 생활을 했다.

또한, 고암 선생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으며 각각의 난세마다 중봉 조헌, 사계 김장생과 함께 충청도에서 의병활동도 진행했다.

평균수명이 35세 내외였던 조선 시대, 두 차례의 난을 겪고도 79세까지 장수한 고암 선생은 학문을 숭상하고 충효를 몸소 실천하며 구국 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지금까지도 옥천군민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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