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독립지사 김현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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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독립지사 김현구 선생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10.1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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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향한 울부짖음, 글로 남기다
김현구 선생
김현구 선생

김현구 선생은 1889년 옥천에서 태어났다. 옥천의 독립운동가 범재 김규흥 선생과는 깊은 인연이 있었는데 바로 범재와 17살 차이나는 이종사촌 지간으로 형이었던 범재가 김 선생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김 선생의 유소년 시절 범재는 이미 대한자강회에서 적극 활동하며 동시에 옥천에 창명학교를 설립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김 선생은 범재를 통해 신문물을 접하며 ‘교육을 통해 백성을 깨우쳐야한다’는 실력양성론에 적극 공감하게 된다.
1906년 서울로 상경한 김 선생은 범재의 도움으로 식산학교에 입학, 이후 보성학교에서 공부를 이어가며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를 저술한 박은식·‘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국채보상운동의 주역 양기탁 등 여러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김 선생은 범재를 따라 상해무관학교로 가 독립운동에 한 몸 바치길 원했으나 결국 계획이 물거품 되고 1909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라며 다양한 문화에 관용적인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당시 미국은 길에서 흑인이 백인에게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인종차별이 만연한 국가였다. 동양인으로서 미국 내 만연한 인종차별에 상처도 많이 받았겠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1918년 6월 오하이오 컬럼버스 대학에서 정치와 철학을 공부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1919년 ‘신한민보’ 주필로 봉사했고 1929년과 1933년 하와이 대한인교민단·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는 동시에 ‘국민보’ 주필 활동까지 했다.
이 시기 이승만이 1925년부터 추진해 오던 동지촌 건설의 실패와 동지식산주식회사 몰락으로 동지회가 재정난에 빠져 교회재산과 교민단의 회관을 매각하여 이에 충당하려고 했을 때 김원용 등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반대, 저지한 까닭에 이승만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져 해방이 되고도 1962년까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1939년에 중일간의 전쟁이 고조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는 1940년 9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이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에 제의했다.
결의에 따라 1941년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됐고 하와이 호놀룰루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가 설치됐다. 의사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힘있게 추진했다.
그 뒤 1944년 구미외교위원부 외교위원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광복 후인 1951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했고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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