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서면 3·1운동의 주역 검한재 김순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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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면 3·1운동의 주역 검한재 김순구 선생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10.22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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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한재 김순구 선생
검한재 김순구 선생

 

검한재 김순구 선생은 1867년 옥천군 군서면에서 태어나 충북 일원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한 군서면 3·1운동의 주역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심이 깊으며 착실했을 뿐만 아니라 잘생긴 얼굴, 단정한 용모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


1905년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검한재 선생은 단식으로 투쟁했다. 
1907년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위에서 물러나고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모든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선생은 옥천 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을 순방하며 애국지사들을 모아 일본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다. 고종의 시신을 염했던 사람이 “시신이 사후 1~2일 밖에 되지 않았는데 부패가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고 목부터 복부까지 검은 줄이 나 있었다”라고 증언해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민중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는 전국적 규모 3·1운동의 시발점이 된다.


1905년부터 일제에 대한 항일 운동을 전개한 검한재 선생은 옥천에서 동료들과 3·1운동을 계획한다. 3월 19일 옥천읍에서 500여 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려 하지만 사후의 일을 걱정한 몇몇 동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날을 미뤘다 
그 후 이어 옥천, 회인, 문의, 조치원 청주 괴산 등 전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에서 제일 성대한 조치원 횃불 시위 선봉장을 비롯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으며 음력 3월 8일 선생의 고향인 군서면에서 500여 명을 지휘해 만세운동을 진행하고 횃불 시위를 벌였다. 만세운동을 한창 진행하던 중 옥천과 대전에서 경찰과 헌병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중을 해산한다. 
다음날 새벽 검한재 선생은 옥천을 떠나 다시금 충청도를 돌아다니며 동지를 모아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한다. 


일제는 검한재 선생을 잡지 못하자 선생의 동지들을 구속하고 고문한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6월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해 주모자임을 밝히고 죽음을 각오한 채로 조국을 잃은 슬픔과 일본의 잔혹함에 대한 분노를 담아 동지를 석방하라고 외쳤고 동지들은 바로 석방됐다.
선생은 이후 공주 감옥으로 이감돼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외쳤다는 죄로 고문을 받는다. 


특히 충청도 일원과 옥천 만세 운동의 주역이자 옥중에서조차 외부와 연락하며 창살을 숟가락으로 두들겨 만세운동을 전개한 검한재 선생에겐 더욱 고문이 가혹했다. 
선생이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혼절하자 일본은 정신을 잃은 선생을 죄수복을 입은 채 나무상자 관속에 넣은 후 관에 대못을 박아 숨을 끊었다. 
일제가 선생을 절명시킨 저 방법은 매장을 위해 관을 뜯어 확인한 선생의 시신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감옥 동지들의 구술을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김회준 항일투사(선생의 아들)가 증언으로도 남겼다. 


1985년 보훈처에서 묘비를 하사하여 봉분 확장 작업을 하던 중 묘지에서 옥중 만세운동에 썼던 숟가락과 검한재 선생 사망의 주원인 대못이 증거물로 여러 개가 증언과 같이 발견됐고 현재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 3.1운동 기념관에 전시돼있다. 


매년 음력 3월 8일 하동리 산 33-1에 있는 충민사에서 검한재 선생 그리고 선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한 25명의 항일투사를 기리며 배향을 올린다. 정부에서는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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