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 청명 임창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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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현 청명 임창순 선생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11.0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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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임창순 선생
청명 임창순 선생

 

  청명 임창순 선생은 1914년 옥천군 청산면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최고의 한학자이자 금석학자 다. 4세 때부터 조부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학교는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곳’이라 며 반대한 조부의 뜻과 가세가 기울어감에 따라 정규 교육과정은 생략했다.

 조부의 별세 이후 잠시 학문과 연을 잇지 못하다가 14세부터 보은에 있는 기숙형 서당의 일종인 관선정에 들어가 겸산 홍치유 선생에게 6년간 한학을 배웠다.

  20살 무렵엔 가세가 더욱 기울어 대구에서 품을 팔기도 했으나 서당에 다닐 때부터 꾸준히 신문을 보며 사회 인식을 넓히고 국어와 국사에 대해 틈틈이 공부 한 덕에 해방 직후 국어과 차석, 국사과 수석으로 중등 교원 임용 시험을 통과해 경북중학교, 대구 사범학교 등에서 강사 생활을 했다.

  이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보은에 기거하던 선생은 국토가 안정될 무렵 서울한의과대학의 전임강사로 활동했으며 1953년부터는 겸산 홍치유 선생 아래에서 수학한 연이 있는 신석호 선생의 추천으로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강의하게 된다. 이 외에도 고려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등에 출강하며 사료 강독과 한국 고대사 위주로 수업을 진행했다.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하자 청명 선생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을 보여준다.
그는 성균관대 교수로 재직하며 교수집회에 앞장섰는데 당시 결의문에 ‘대통령 하야’ 구호를 넣을 것을 주장했고 집회 당일에 들었던 플래카드에 같은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조윤제 선생의 제안에 따라 “學生(학생)의 피에 報答(보답)하라”는 구호를 친필로 적어 넣었다.

  1963년 청명 선생은 우리나라 한문 교육의 산실로 불리는 태동 고전연구소를 설립했다. 고려대 졸업생들이 찾아와 “청명 선생 밑에서 더 수학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고 장소를 빌려 하루 한 시간씩 강의하기 시작한 것이 연구소 설립의 계기가 됐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난 후 선생이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선 대학 졸업자를 뽑아 장학금도 주고 일정한 연한을 정해 집중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 최종현 회장이 교육법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장학금을 지원해 청명 선생의 계획이 성사됐다.

  1985년엔 한림대학교가 연구소를 운영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청명 선생은 그동안 마련했던 토 지, 가옥, 서적 전부를 한림대 측에 무상으로 기증한 후 연구소를 대학 부설로 해 소장 직책만을 가지고 연구소 운영에 전념했다. 그는 우리 역사 연구와 해석에 금석학을 활용해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

  전국 각지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해석, 판독했고 특히 단양 적성비를 판독해 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 이에 1971년 문화재 위원으로 위촉됐으며 1985년부터 1995년까지 문화재위원장으 로서 우리나라의 문화재 지정 및 관리를 담당하는 큰 직책을 맡았다.

  1998년 경복궁 흥례문(광화문과 근정문 사이 중문) 상량문을 직접 쓰기도 한 청명 선생은 199 9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연구 정신과 학계에 끼친 업적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며 2009년 예술의 전당에서는 청명 선생 작고 10주기를 맞아 그의 유묵전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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