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쌓아올린 칠백의총, 인봉 전승업 선생
상태바
눈물로 쌓아올린 칠백의총, 인봉 전승업 선생
  • 김수연기자
  • 승인 2020.11.19 1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승업 선생이 세운 칠백의총
전승업 선생이 세운 칠백의총

1547년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난 인봉 전승업 선생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인봉은 과거를 보는 데에 필요한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과거 시험을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568년 증광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고 3년 후 다시금 급제했지만 초시에 합격한 사람을 대상으로 치르는 시험인 회시에서 고배를 마셨다.
인봉은 “선비가 참됨을 잃는 데는 과거 시험을 자주 보는 것 같은 게없다”며 과거 공부를 이어가는 대신 자신의 인격을 닦는 데에 집중했다. 천거에 의해 중학교수·동문교관 등에 임명됐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사양했다.


1500년대 후반, 인봉은 벼슬을 그만두고 보은·옥천에 내려와 있던 조중봉을 만난다. 뜻이 통함을 알게 된 둘은 자주 만나며 강론을 즐겼는데 당시 인봉과 중봉은 조선을 둘러싼 명과 일의 태세에 우려를 표하고 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했다. 그들의 예상대로 1592년 4월 임란이 일어나고 왕이 한양을 떠나 북으로 올라가자 그는 중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다짐한다. 


중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인봉은 청주성 서문 밖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청주성을 탈환했고 이를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관군과의 충돌로 전달되지 못했다. 인봉은 직접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선조가 피난 가 있던 평안북도 의주로 향했다. 
인봉이 의주로 향한 사이 중봉 선생은 일본군이 점령한 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다. 1592년 9월 23일 금산에선 중봉 선생이 이끄는 700여명의 의병에 영규 대사가 이끄는 600여명의 승병이 합세해 약 1만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에 나섰다. 그들은 혈전을 벌였지만 8배에 가까운 병력 차이로 인해 중봉 선생과 그의 아들 조극관, 영규 대사를 비롯한 모두가 장렬히 전사했다. 


인봉은 의주로 향하던 길에 조중봉이 금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가지고 가던 봉사를 곽현에게 넘겨 의주의 행궁에 전하도록 하고 곧바로 금계의 싸움터로 돌아온다. 이후 그는 금산 전쟁터에 도착해 수일에 걸쳐 의병과 승병의 시신을 거두고 큰 무덤을 만든다. 이것이 지금의 칠백의총이다. 
전우의 시신을 거둔 후 그는 옥천으로 돌아와 중봉의 장례를 올리고 중봉이 나라에 올린 글 등을 모아 유고집을 펼쳐낸다. 


뿐만 아니라 인봉 선생은 이후 인봉초당에 중봉 선생의 모친을 모시고 자식을 친자식과 다를 바 없이 보살폈다고 한다.
인봉 선생은 중봉의 사망 이후 평소 앓던 오랜 지병에 울화까지 더해 건강 문제가 더욱 심해졌고 금산전투에 조중봉과 함께 참여하지 못했음을 한탄하다 1596년 정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한편 2007년엔 옥천 전씨 문중에서 인봉의 14대손 한학자인 전규호씨를 중심으로 인봉 선생의 시와 부(賦), 제문(祭文)과 행록, 행적 등을 엮은 책 『인봉선생 유고집』을 출간했다. 
이 유고집에는 임진왜란 초 중봉과 인봉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조헌이 인봉 선생에게 보낸 편지 등이 수록돼있다. 
지난 2008년 인봉 선생의 고향인 동이면 금암2리 옥천 전씨 선산에는 ‘인봉 전승업 선생 충의비’를 건립해 인봉 선생의 애국심과 얼을 계승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