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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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1)
  • 조종영작가
  • 승인 2021.01.0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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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남아를 낸 것이 어찌 우연이리오

 

경기도 김포현 감정리에 있는 중봉산 아래 고즈넉한 곳에는 초가들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강을 따라서 너른 김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1544년(중종 39년) 6월 28일, 가난한 선비의 집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우렁찬 울음소리가 중봉산을 메아리쳐 한강변으로 울려 퍼졌다.

그가 바로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이요 임진4충신(壬辰四忠臣)의 한분인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다.

본향은 황해도 배천(白川)이며 자(字)는 여식(汝式), 호(號)는 도원(陶原) 또는 후율(後栗)이라고도 했다. 지금 널리 알려진 중봉(重峰)이라는 호는 말년부터 쓰인 것이다.

부친은 계현공 조응지(趙應祉)이고 어머니는 용성 차(車)씨이다. 부친께서는 청송(聽訟) 성수침(成守琛)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벼슬길에는 나서지 않았다.

조부 세우(世佑) 역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지만 충무위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지냈을 뿐이다.

부친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권세도 없었고 가진 것이라고는 초가삼간에 입에 풀칠할 정도의 땅 밖에 없었다.

집안은 비록 가난했으나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의 혈통인 가문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배천 조 씨(趙氏)는 고려조에 현 부총리 격인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지린(之遴)을 시조로 한다.

그는 송나라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손자인데 황실의 정란을 피해 고려에 들어와 성종, 목종, 현종 3대에 걸쳐 벼슬을 했다.

그의 후손들도 모두가 관직에 나아가 벼슬을 했는데아들 양유(良裕)는 덕종 때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냈고 문하시중(門下侍中) 배천군(白川君)에 추봉 되었으며 손자 문정공(文靖公) 선정(先正)은 문종 원년에 장원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太子太師)에 올랐다.

선정의 자손들도 문장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치고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대제학(大提學) 등의 중직을 지냈다.

고종 때에 원나라가 침입하여 전 국토가 유린되고 조정이 강화도를 피난하게 되었다.

병부상서(兵部尙書), 문하시중을 지낸 충무공 문주(文柱)는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원나라 군대가 온갖 살상과 약탈을 저지르는 등의 만행과 그 폐단을 간곡하게 아뢰어 군대를 철수시키는 공을 세웠다.

그가 선생의 12대조다.

8대조인 천주(天柱)는 3형제가 과거에 동시 급제하였다.

그가 판사 농사(判事農事)로 있던 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범하는 난이 일어났다.

천주는 지금의 대장 격인 상장군(上將軍)으로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이방실(李芳實)과 출전하였다.

그는 박천 전투에서 두 차례나 적을 무찔렀으나 안타깝게도 안주를 습격한 적과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국하고 말았다.

천주의 아들 공(珙)은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있었다.

그는 고려 말에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더불어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결국 조선이 개국하자 출사 하지 않고 개성 치악산에 들어가 은거하다 죽으니 고려명류십열(高麗名流十烈)로 두문동 서원(杜門洞書院) 정정실(靖節室)에 배향되었다.

고려조에 영예를 누리며 충성하던 조헌의 선대는 조선조에 들어서는 출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5대조인 환(環)이 세종의 부름을 받아 강화부사(江華府使), 나주목사(羅州牧使), 상호군(上護軍)을 지냈을 뿐이다.

조헌은 어려서부터 이러한 가계의 내력과 전통을 부친으로부터 상세히 듣고 배우며 비록 집안은 한미 해지고 가난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선조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장차 자신이 나아갈 바를 일찍부터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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