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설립부터 무장투쟁 지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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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설립부터 무장투쟁 지원까지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1.1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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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규흥 선생
김규흥 선생은 중국에 체류하던 중에도 옥천에 들러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김규흥 선생은 중국에 체류하던 중에도 옥천에 들러 재산을 처분하고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1872년 문정리의 갑부 집안에서 태어난 범재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교육받았다.

초기엔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성리학을 정학으로 삼고 성리학 이외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는 운동)을 따랐으나 서울로 상경한 후 다양한 사상을 접하며 개화사상에 눈길을 돌렸다.

1902년에는 내부주사를 1905년에는 숭릉 참봉을 지내며 관직생활에 몸 담았으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현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인 창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통해 민족의 힘을 키워 내고자 했다.

1907년 범재는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강제 퇴위된 고종에게 밀명을 받고 상하이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중국으로 가 상인으로 변장해 중국의 부호, 군벌등을 찾아 다니며 지원을 약속받는다.

하지만 그는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일본에게 발각돼 인천에서 체포 당한 후 100일 간 감금, 이후에도 1년 간 감시를 받았다. 범재는 1년 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중국으로 망명했다.

1908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1909년 5월경 광동으로 이주, 1911년 중국에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광둥성에서 활약해 총유정처 참의, 고문원 등에도 임명된다.

범재는 중국 혁명 세력과 함께 공화운동에도 참여했으나 당시 위안스카이가 헌법을 무시하고 독재를 펼치자 토원운동에 가담, 실패 후 홍콩으로 이동했다.

그는 박은식과 함께 ‘향강잡지’를 창간했는데 위안스카이의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곧 폐간된다.

범재는 베이징으로 이동해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다가 독일인들과 시베리아 철도를 파괴해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연락을 단절시키고 일본을 고립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하지만 그 계획 또한 일본과 러시아에 노출돼 실패했다.

범재는 베이징에서 중국의 인사들과 교제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

그는 1919년 군자금 모집을 위해 흥국실업은행을 창립한 후 투자금을 받고 1921년 옥천에 잠시 들러 집안의 재산을 처분해 출자금 모집에 사용했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금을 가지고 북경군사통일회의 활동을 지원했는데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출자금은 모이지 않아 중국측 주주의 신뢰가 추락하며 은행은 폐쇄됐고 그가 둔전병(둔전을 경작해 군량미를 공급하고 유사시에는 부대에 편제돼 전투에 동원되는 병사) 양성을 위해 추진한 석경산농장 경영도 좌절됐다.

그는 모든 활동이 실패한 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베이징에 체류했고 1929년 톈진으로 이동한다.

1936년 톈진에서 이질이 발병해 이질과 치료제 중독으로 이국땅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옥천에 안장됐다가 200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이장됐고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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