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제에 방치된 유해를 호국원에 안장해 달라"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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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에 방치된 유해를 호국원에 안장해 달라"①
  • 천성남국장
  • 승인 2016.06.30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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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

32년간 은폐돼 오다 비로소 백동호의 동명소설로 영화화된 ‘실미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충격 실화 실미도 사건의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지난 24일 본사를 찾아온 2명의 유족들로부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1968년 3월, 옥천지역에서 한꺼번에 행방불명됐던 7명의 청년 중 한 사람이었던 이광용(당시 일일노동자)의 동생 이경주(59·옥천 장야리)씨와 대전 한밭체육관 권투선수였던 이명구의 동생 이명철(59)씨다. 이들 유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혈육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동분서주 했던 처절했던 체험담을 꺼내놓으며 타들어가는 듯 입술을 적셨다. 본란은 국방부진상조사보고서, 유족 증언을 바탕으로 10회 연재된다.                   <편집자주>

 

유족인 이명철씨가 보관하고 있던 일명 684실미도 훈련병들.

“지금 저희 유족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닙니다. 지난 2004년부터 현재까지 벽제 컨테이너 부대 창고 안에 있는 유해들을 국립묘지나 호국원으로 승격해 안장해 달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족들은 이명박 정부에 위령 비를 세워 달라고 요구해 왔으나 중단되었고 오늘에까지 중단에 이르고 있습니다.”

옥천지역에서 행방불명됐던 7명 중 하나인 일일노동자였던 이광용의 동생 이경주씨와 대전지역에서 포섭된 이명구의 동생 이명철씨는 한 목소리로 이같이 말하면서 국가에 하소연했다.


실미도 부대 창설배경
1968년 1월 21일, 북한124군 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급습하는 사건이 발생, 생포된 포로에 의해 이들의 침투목적이 대통령 암살임이 밝혀지게 됐다.

1968년 북한의 원산항 근처에서 미국의 해군 푸에블로호가 나포돼 83명의 미승무원이 포로로 잡혀가자 남-북간, 북-미간 일촉즉발의 긴장 국면으로 치달았다.

이에 따라 한-미동맹 간에 긴장이 흐르고 보복주장에 따라 1968년 1월26일 중앙정보부와 공군부대에 각 군에 특수부대 창설이 요구되었다.

창설시기,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보복작전을 펴기 위해 특공결사대를 조직하기로 결심했고 대통령은 이 작전계획을 처음부터 알고 재가를 내려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미도 부대는 공군소속임에도 공군 2325부대장과 209파견대장은 중앙정보부 소속처럼 운영돼 지휘계통상 문란으로 공군본부의 지휘권 행사에 제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수 공작원 모집
특수공작대는 물색방안으로 △접촉지역을 경인지구, 전방지구, 부산지구, 서해지구 중 교도소, 우범지대, 무술도장 등을 선정했고 △물색대상으로는 애국정신이 투철한 21~27세 남자 △공작원 회유조건으로는 채용과 동시에 현역사병 계급부여, 교육수료 동시 하사관, 장교 임관, 상당액의 특수수당 지급, 침투귀환 후에는 후방에서 교관 등으로 채용 등이 승인됐다.

1968년 3월 11일~4월 14일 서울, 경기 문산,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대전, 충북 옥천지역에서 물색활동을 통해 전국에서 차출된 젊은 청년들이 31명 포섭됐다.

1968년 4월 6~14일, 적격심사 및 최종 선정과정에서 대전, 옥천지역에서 최종 8명을 선발했고 추가 탈락자 발생으로 이명구 등 7명을 포섭해 면접 후 최종 선발하고 열차편으로 인천에 도착한 후 실미도에 수용됐다.

실미도는 인천광역시에서 남서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 바로 아래쪽 무의도와는 하루 2번 썰물 때 개펄로 연결되는 섬으로 대부분이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안은 모래와 개펄이 뒤섞여 있는 무인도였다.


최종 선정 공작원 명단
최종 선정된 공작원 명단은 이부웅(경기포천), 윤태산(경기파주), 황철복(대전), 이영수(경기파주), 장정길(경기파주), 임기태(경기부천), 정은성(경기파주), 장성관(서울영등포), 조석구(충남논산), 김용환(충남공주), 전영관(충북영동), 이서천(대전), 임성빈(충남), 김창구(충북청주), 박응찬(대전), 강찬주(서울), 김종철(대전), 전균(파주), 이명구(대전), 김봉용(충북옥천), 정기성(충북옥천), 박기수(충북옥천), 김병염(충북옥천), 이광용(충북옥천), 장명기(충북옥천), 김기정(충북옥천), 심보길(무), 박원식(경기파주) 이상 28명, 1968년 4월 14일 1차 28명선정 입도 후 3명(신현준, 강신옥, 윤석두 추가 선정)
(당시 공군2325부대에서 중앙정보부에보고한 문건의 내용)


공작원의 신분
1) 모집조건 : 공군2325부대 소속 모집관들은 공작원들을 민간인 신분의 비정규 공작요원으로 비밀리에 모집하고, 훈련기간 장교후보생으로 대우 및 보수지급을 약속(3개월간 3200원 지급). 훈련 종료 시 소위로 임관, 임무수행 후 충분한 보상 및 원하는 대로 배속, 직장알선, 충분한 보상 약속. 그러나 위원회 조사결과 공작원들에 대해 병역법이나 군인사법에 의한 현역병 입영조치나 장교 및 하사관 임용에 대한 인사 조치는 없었다.

2) 훈련시 대우 : 공작원을 피교육자, 공작원, 상호간에는 후보생으로 호칭하였다. 1971년 6월경 2325부대에서 국방부에 훈련생 전원을 하사관으로 임명시킬 것을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당시 군 수뇌부의 인식 : 공군참모총장 김두만은 실미도 부대 공작원을 민간인으로 보고했고 국방부 장관 정래혁은 1971년 8월 24일 국회국방위에서 공작원들의 신분이 ‘군인이나 군속이 아닌 민간인’(71회 국회국방위 회의록 제3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4) 공작원은 민간인 신분 : 군인은 보통인사기록카드가 군적으로 관리되는 반면, 실미도 부대 공작원의 경우 인사기록카드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군번이 있었고 장병일보에 이등병으로 기재, 근거명령이 존재하였다는 점이 인사기록카드의 존재 사실과 동등하게 평가되어 군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실미도 부대는 중앙정보부로부터 부대의 정식 명칭이 684부대로 명명됐다. 684란 이름은 1968년 4월에 창설되었다고 붙여진 것이다.

목적은 북한의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침투해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

〈다음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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