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잎부터 남달랐던 그의 독립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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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잎부터 남달랐던 그의 독립정신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1.28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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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정종석 선생
정종석 선생은 초등학생 때부터 독립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정종석 선생은 초등학생 때부터 독립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1905년 옥천군 동이면 세산리에서 태어난 정종석 선생은 어릴때부터 범상치 않은 독립 의지를 불태워 ‘떡잎부터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그가 죽향초등학교에 다니던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로 국내 일본인들 대부분이 조선인에 대해 무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심지어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긴 장도를 차고 수업에 임했고 학교에서도 한국어 대신 일본어만을 사용해야 했다. 


정 선생은 이에 대해 불합리함을 느끼고 초등학교 4학년때 옥천읍 소정리 철도 교각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글귀를 새겨 당시 죽향초등학교 교직원과 마을 주민 심지어 일경까지 놀라게 했다.


이후 정 선생은 광주로 이사해 광주농업학교에 재학하는데 1926년 1월 동료 최규창의 하숙방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학생 15명과 함께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했다. 성진회는 조선의 독립·사회과학연구·식민지노예교육체제반대 등을 강령으로 내세워 활동 결의를 굳혔다.


성진회는 매월 10전의 월회비를 거둬 활동 자금으로 사용했으며 첫 번째·세번째 토요일에 모여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 과학을 통한 식민통지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결정했다. 회원들 또한 비밀엄수와 동지포섭을 통해 조직확대에 만전을 기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고 설상가상으로 1927년 회원 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올라가자 결국 회원들은 정남균의 집에 모여 성진회를 해체하는 모임을 가진다. 


비록 성진회는 해체됐으나 주동학생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28년 2월 졸업을 앞둔 정 선생과 그의 동료 최규창·이동선 등은 광주 내 각 학교 학생지도자 12명과 함께 지용수의 집에 모여 사회에 나가서도 긴밀히 연락을 주고 받으며 항일 운동을 멈추지 않을 것을 결의했다.


졸업 후에도 정 선생은 광주농고 독서회 활동을 지속했는데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성진회 운동과 관련해 일경에 붙잡혔다. 
정 선생은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1931년 징역 1년형이 확정돼 옥고를 치렀다.
정 선생은 출옥 후 옥천군에서 지내다가 1973년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높이 사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91년 4월 13일, 그의 고향인 동이면 평산리에선 항일 독립투사 정종석 선생의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으며 1997년엔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학생’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함께 비밀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이바지 한 그의 독립정신과 실행정신은 현재까지도 옥천군민이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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