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이 지극한 의지의 소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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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이 지극한 의지의 소년(3)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1.2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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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 4
1648년(인조 26) 조헌 선생 생가 터에 세워진 우저서원(牛渚書院)
1648년(인조 26) 조헌 선생 생가 터에 세워진 우저서원(牛渚書院)

 

조헌은 태어날 때부터 바탕과 성품이 남다르고 몸가짐과 예절이 훌륭했다. 큰 키에 큰 귀를 가졌으며 눈빛은 별과 같이 빛났다. 집안이 가난한 그는 겨울에도 다 떨어진 옷과 신을 신고 숲이 우거진 으슥한 산길의 고개를 넘어서 추위를 무릅쓰고 서당에 다녔다. 그가 다니던 여우고개에는 지금도 조헌에 관한 전설이 전해온다.


여우고개에는 백 년 묵은 여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조헌이 이곳을 지날 때면 예쁜 처녀로 변신해 “지나가는 어린 선비양반님, 나를 떼어 놓고 가시면 어떻게 하시오리까”하며 유혹했다. 


처녀가 매일 같이 조헌을 꾀자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발동했으나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스승에게 이 사실을 여쭈었다. 이 말을 들은 스승은 이렇게 일렀다.
“그 미녀의 입안에는 틀림없이 구슬이 들어 있을 것이니 그녀가 너를 꾈 때에 주저하지 말고 그 구슬을 빼앗아 삼켜라. 그러면 훗날에 너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조헌은 스승이 일러준 대로 그 미녀의 입 안에 있는 구슬을 삼켜 버렸다. 그러자 미녀는 갑자기 여우로 돌변하여 울며 달아났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고개에 넓은 길이 뚫려서 옛 모습은 찾을 수가 없으나 아직도 조헌 선생을 추억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그는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품이었다. 하루는 동리 아이들과 개울에서 낚시질을 했다. 다른 아이들은 고기를 많이 잡는데만 뜻이 있어서 자주 자리를 바꿨다. 그러나 조헌은 한 곳에 오래 머물며 고기를 낚았다. 저녁 무렵에 잡은 고기를 비교해 보면 늘 중봉이 많았다. 


동리에서 가까운 곳에 조그만 연못이 하나 있었다. 깊이가 한 길은 넘었고 물고기가 매우 많았다. 어느 날 아이들과 놀러 갔다가 그 연못의 물을 퍼내고 고기를 잡기로 했다. 서로 교대를 해 가며 물을 푸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이 되었으나 아직도 물은 많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힘도 들고 싫증도 나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러나 조헌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산도 평탄하게 할 수 있고 하천도 막을 수 있거늘 이 일도 벌서 반은 이루었는데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물 푸기를 계속했다. 아이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돌아갔고 남은 아이들도 오늘은 그만하고 내일 다시 하자고 했다. 그러나 조헌은 “그렇지 않다. 오늘 밤 이것을 중지하면 이 물이 다시 흘러들어 지금까지 한 것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라고 하며 남은 아이들에게 강제로 권해 기어이 밤을 새워 물을 퍼내고 고기를 잡아서 돌아갔다. 


이처럼 그는 어려서부터 한 번 마음 먹으면 끝을 내고야 마는 성품이었다.


이러한 기질은 공부에도 그대로 발휘됐다. 그가 열두 살이 되던 1555년에 비로소 시서(詩書)를 배운다. 어촌(漁村) 김황(金滉, 1524~1593)은 유성룡과 동문수학하고 명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김포에 거주할 때에 조헌에게 시서를 가르쳤다.


조헌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학문에 정진했고 어버이에 대한 효성은 더욱 지극해갔다. 경서(經書)를 읽고 또 읽으며 그 책에 담긴 진리를 하나하나 깨닫는 것을 참으로 즐겁게 생각했다. 매일 밤늦도록『중용(中庸)』, 『대학(大學)』,『이소경(離騷經)』,  『출사표(出師表)』 등을 읊고 외웠으며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서 계속했다. 그는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가장 좋아해서 이를 모두 암송했다. 먼 길을 여행할 때에도 그 목록만을 뽑아 가지고 다니며 외웠다.
그가 평생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책을 읽었는데 이는 어려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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