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석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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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박석호 선생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2.0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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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화법과 동양미의 조화
박석호 화백은 생애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독자적 그림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박석호 화백은 생애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독자적 그림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힘썼다.

 

박석호 선생은 1921년 이원면에서 태어난 현대 미술학의 거장이지만 일찍이 옥천을 떠나서인지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의 호는 한원(寒園)으로 이원 소학교에서 기초 수학을 마친 후 경상북도 김천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 이후 서울로 상경해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김중현의 화실과 남관의 화실에서 그림을 익혔다.

박 화백은 정규교육없이 1946년 ‘앙데팡당전’에 출품해 ‘미술협회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을 만큼 그림에 대해 열정적으로 탐구해 나갔다.

1949년 그는 28살의 나이로 처음 생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1회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새로운 대학생활도 잠시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그는 1953년 졸업한다.

당시 미술학과의 유일한 1회 졸업생이었던 것.

그는 졸업과 동시에 학교 조교로 근무하며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교수 김환기를 만난다.

김환기는 박 화백에게 호를 지어준 인물로 ‘박 화백의 성격이 너무 착하다’며 차게 살라고 한원(寒園)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박 화백은 조교에 이어 조교수, 부교수 등을 거치고 1960년대 전반을 모교에서 보내며 창작활동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967년에 학교의 부당한 인사행정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동료 교수와 함께 홍익대학교 교수직에서 사임했다.

같은 해 상파울루 비엔날레에도 작품을 출품했으나 아쉽게도 이 당시 작품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그의 유족에 따르면 홍익대학교 교수직에서 사임한 후 지방의 한 대학교에서 초빙교수 제의가 들어왔으나 이를 거절한 후 전업작가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박 화백은 부·명예 뿐만 아니라 작풍이나 시속에도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했다는 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70~80년대 어촌 서민들의 삶을 회색, 짙은 남색 등의 색채를 사용해 그림으로 그려냈다.

이런 그의 그림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청년일 때 미술을 가르쳤던 화가 김중현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그가 맹목적으로 김 화백의 길을 따라간 것은 아니다.

그는 서양 석고 데생 뿐만 아니라 경주 남산 불상 등을 데생해 서양식 화법에 동양의 미를 더하는 등 작품 세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구했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 초반 위암을 진단받고 수년의 투병생활 끝에 흙으로 돌아갔다.

뛰어난 예술적 역량과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전에 걸맞게 평가받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1990년대 후반부터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이 주최한 ‘재조명작가전’의 첫 초대작가로 선정돼 약 1달간 그의 작품 350여점이 예술의전당 미술관 1,2전시실에서 전시됐으며 박 화백의 작품을 재조명하는데 힘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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