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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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 (5)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2.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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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成均館)에 진학한 청년 선비

조헌은 18세에 영월 신(辛)씨 가문에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 덕재(德齋) 후손인 신세성(辛世誠)의 딸과 혼인했다.

그는 장가든 후에도 학문에 힘쓰는 일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로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선비나 학덕이 있는 어른들을 찾아가서 토론하고 가르침 받기를 청했다. 조헌의 마음속에는 늘 학문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에게 새로운 진리와 학문을 가르칠 만한 스승이나 선비를 만나기란 쉽지가 않았다.

이때부터 조헌은 학문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욕심에 성균관(成均館) 진학을 꿈꾸게 됐다.

그 날도 이름난 선비를 찾아 서울을 다녀오는 길에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서울을 오가려면 반드시 양화진(楊花津) 나루를 건너야 한다.

한강 북안에 위치한 지금의 마포 합정동으로 강화와 김포로 가는 나루터인 양화진은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당시에는 이 일대를 양천강(陽川江)이라고도 불렀다.

작은 나룻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사공이 노를 저어 강 가운데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갑자기 광풍이 불고 파도가 일며 배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게 됐다.

배에 탄 사람들은 놀라서 아우성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뱃머리에 앉아 있던 조헌은 꼼짝도 하지 않고 태연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에 세차게 불던 바람이 멈추고 배안의 분위기도 진정됐다.

배가 뒤집힐 위기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조헌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몹시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조헌을 향해 “한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너는 무엇을 하는 인간이기에 꼼짝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앉아 있느냐” 하고 화를 내며 손찌검까지 하려고 들었다.

이에 조헌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삶과 죽음은 하늘에 달려 있거늘 어찌 사람이 울고불고 아우성을 친다고 위험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의연한 태도로 대답했다.

이에 더 흥분한 사람들이 한바탕 싸움을 할 기세였다.

그때였다.

그 배에는 김후재(金厚載)라는 선비가 타고 있었다.

조헌의 말에 감복한 그는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하고 사람들을 만류해서 간신히 진정시켰다.

전혀 알지 못하는 그 선비는 배가 나루에 도착하자 조헌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갈 길을 갔다.

이처럼 조헌의 대범함과 의연함을 알 수 있듯이, 그는 젊어서부터 장엄 정중하며 엄숙하고 굳세어서 사람들이 감히 농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1565년(명종 20년), 22세가 되는 해에 그동안 생각했던 성균관 유학의 꿈을 이룬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 학문의 전당으로 지금의 대학과 같은 곳이었다.

성균관에 유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이다.

유생들과 중 보우(普雨)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고 몇 달째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임금의 비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보우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섭정을 할 때에 불교를 부흥시킨 사람이다.

이는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의 기본정책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마침내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생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유생들은 싫증도 나고 힘도 들고 하니 숙소에서 쉬기도 하고 집에서 왕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헌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궐 문 앞에 꿇어 앉아 임금의 비답을 기다렸다.

이에 함께하던 유생들과 지켜보던 군중들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보우는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에 피살된다.

이처럼 조헌은 매사에 의연하고 대범한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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