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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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일대기 지당에 비 뿌리고 (7)
  • 조종영 작가
  • 승인 2021.02.2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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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남아를 낸 것이 어찌 우연이리오

 

정주목 교수로 2년을 재직한 조헌은 1570년(선조 3년)에 다시 파주목(坡州牧) 교수(敎授)로 자리를 옮긴다. 이때에 처음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선생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청하여 제자가 된다.

성혼의 학덕과 학문의 깊이는 이미 경지에 이르러 당시에 있어서 율곡(栗谷)과 비길만한 대학자였다.

그는 조헌에게 역경(易經) 속에 담긴 하나하나의 진리를 자상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성혼은 조헌의 학문에 성취도가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는 자기를 스승으로 대하는 것을 끝까지 사양하고 외우로 생각했으나 조헌은 끝내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가 파주목 교수로 1년 정도를 지낸 다음 해 1571년(선조 4년)에 다시 홍주목(洪州牧) 교수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1517~1578) 선생을 만나게 된다.

조헌은 이지함 선생의 높은 학문을 익히 알고 있었다.

홍주목 교수로 부임한 그는 인근에 계신 선생을 찾아가서 사제의 연을 맺고자 가르침을 청하였다.

토정 선생은 역학, 의학, 수학, 천문 지리 등에 해박하고 진보적이며 개방적인 사상의 학자였다.

보령현(保寧縣)에서 태어난 그는 출사를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다가 말년에 포천 현감으로 나갔다.

다시 아산 현감에 제수되어 걸인청(乞人廳)을 세우는 등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썼다.

조헌과 여러 차례 학문을 토론한 토정은 그의 학식에 크게 놀라며 “그대의 덕기(德器)는 하도 높고 깊어서 나로서는 가르칠 만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며 제자로 맞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그리고 조헌에게 이렇게 일렀다.

 “우리의 무리 중에는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구봉(龜峯), 세 사람이 있는데 이들 모두가 학문이 고명하고 행실이 지극히 모범이 되네. 그리고 우리 조카 이산보(李山甫)와 우리 문생 서기(徐起) 두 사람 모두가 충신이 기댈 만하고 지성이 금석(金石)을 관통할 만한 하니 만약에 이 다섯 사람과 더불어 사우(師友)를 맺는다면 성현의 지위에 오를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하고 당대 최고의 인물들과 교류 할 것을 당부하면서, 율곡 선생을 꼭 찾아뵙도록 권했다.

그해 가을에 조헌은 토정의 권유대로 파주에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선생을 찾아뵙는다.

그리고는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때에 율곡 선생을 모시고 한동안 송도(松都)에 머물면서 학문을 배우고 함께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다가 돌아온다.

당시 율곡은 이미 조선시대를 통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최고봉을 이룬 대학자였다.

이러한 율곡에게서 직접 학문의 깊고 그윽한 경지를 배우니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었다.


그 후 집으로 돌아온 조헌은 율곡과 토정, 우계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을 읽고 음미하며 이 모든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우계(牛溪) 성혼(成渾),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율곡(栗谷) 이이(李珥), 세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고청(孤靑) 서기(徐起)와도 반드시 찾아뵙고 교제하였다.

그의 학문은 날로 발전해서 놀랄만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관직에 있으면서도 훌륭한 스승을 찾아 배우기를 자청하며 학문에 심취한 조헌의 실력은 날로 깊어갔고 후에는 점(占)을 치거나 예언(豫言)하는 일까지도 거의 어긋남이 없을 정도로 통달하여 사물을 보는 혜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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