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종교로 승화시킨 오기억 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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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종교로 승화시킨 오기억 거사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3.11 10: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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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억 거사
어린나이에 가슴 아픈 이별을 겪은 오 거사는 불교에 의지했으며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절을 짓고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데 여생을 바쳤다.
어린나이에 가슴 아픈 이별을 겪은 오 거사는 불교에 의지했으며 자신의 재산을 이용해 절을 짓고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데 여생을 바쳤다.

 

지용로를 따라 석탄리 쪽으로 쭉 들어가다 보면 얕은 오르막길에 위치한 절이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부터 교동리와 죽향리에 거주하는 옥천 주민과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교동리를 지켜온 ‘대성사’다.

대성사는 1922년 오기억(법명상연) 거사가 창건한 절로 곧 창건 100주년을 맞는다.

창건주 오 거사의 조부 괴정 오상규 선생은 1800년대 후반 벼슬길에 나아가 후에 왕실 살림과 업무를 도맡아 관리하는 궁내부 중 시종원의 부경까지 오른 인물이다.

하지만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 넘어가자 옥천으로 내려와 빈민구제에 힘쓰던 와중 1912년 오 거사가 탄생했다.

조부를 닮아서인지 어릴적부터 유달리 총명했던 오 거사는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와 서울 휘문학교 교육과정을 차례로 마치고 일본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1919년 오 거사가 7살 되던 해 그는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한다.

그와 10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나며 때론 형으로 때론 삼촌으로, 아버지로 그를 돌봤던 큰 형 ‘오기만’이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유학하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왔는데 영문도 모른채 갑자기 요절했던 것.

장래가 촉망되는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의 죽음이어서 더욱 안타까웠음이 분명하다.

3년 후엔 자신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줬던 오상규 선생이 서거해 또 한 번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이 때 그의 나이는 10세.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불확실한 국가의 운명,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겪으며 삶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불교에 귀의하고 옥천 군민들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대성사’를 창건했다.

당시 그는 사찰건물을 비롯해 위토답 수십마지기, 위토답 지기 가옥까지 준비했으며 고액의 현금까지 지원했다.

초기 ‘대성사’에는 화주 보살이 사찰을 보살폈으며 화주보살은 보은 법주사의 젊은 스님인 임용순(법명 승관)을 주지 스님으로 영입했다.

이후 해방을 맞았으나 일본이 약탈해 간 제반물자로 인해 빠른 경제적 성장이 어려웠고 민초들의 주머니 사정 또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약 몇 번 먹고 잘 쉬면 손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어 나갔다.

오 거사는 이런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며 대전에 크게 한약건재상을 차려 빈민들을 다수 대접해 돌보고 전국의 한약방에 고품질의 약재를 저렴하게 공급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게했다.

이런 그의 행적은 6·25 전쟁 후까지도 이어졌다.

그는 1960년대 약재유통업을 정리하고 서울로 상경한 후 전국의 유명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불교를 공부했고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간 후 현지 교민들에게 불교 교리를 전파하는데 힘썼다.

이렇듯 한 평생을 중생구제에 몸바친 오 거사는 1980년 8월 16일 미국 LA의 한 병원, 가족들이 지켜보는데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으며 이후 그의 유해는 고향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안장했다.

그는 슬하에 3남 5녀를 뒀는데 1남 오제호(큰집에 양자로 입적)는 약학을 전공해 현재 대전에서 약국을 운영중이며 2남 오근호는 미국에서 공학박사과정을 마친 뒤 한양대 교수로 활동중이다. 3남 오용호는 서울의대를 졸업, 미국 코넬대 의대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으며 5녀중 4명은 현재 미국에서 거주, 1명은 부산으로 시집가 거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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