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접기는 내 인생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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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접기는 내 인생 그 자체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3.11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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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민 대표가 갤러리 겸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
현재 민 대표가 갤러리 겸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

이사 후 얻은 우울증
종이접기하며 극복해

서울이 고향인 민현숙(55) 종이사랑갤러리 대표는 결혼 후인 1997년 옥천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사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사는 생활 반경부터 생활 관련 제반 사항, 가족, 친구, 이웃 주민까지 모든 것이 바뀌는 큰 일이다.
이런 이사를 통해 삶의 활력을 찾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반대의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민 대표는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조금만 걸어가면 버스가 나오고 지하철이 나오는 서울에서 살던 민 대표에게 당시의 옥천은 너무나 낯선 곳이었다.
이사 전엔 눈만 뜨면 빌딩과 사람이 가득했는데 이사 후 민 대표의 눈 앞에 펼쳐진 건 논과 밭 그리고 산뿐이었다. 한참 동안 기다려 버스를 타고 나가야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다다르는 옥천, 혈연과 지연이 중요시 여겨지던 시절이라 그런지 이방인 민 대표는 소속감을 잃어버린 채 점점 활력마저 잃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민 대표는 옥천도서관에서 종이접기 강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찾아가봤다. “설마 내가 종이접기도 못하겠어”라는 마음으로.
필연은 가끔 우연을 가장해 나타난다. 민 대표에게 종이접기도 그렇게 우연처럼 나타났다. 첫 수업, 밝고 경쾌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따라 차례대로 종이를 접다보니 멋진 컵받침이 완성됐다. 이사 후 우울함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녀가 수개월만에 맛보는 성취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민 대표는 그 날 밤을 새워가며 종이접기에 몰두했다. 옆집, 아랫집, 뒷집에 자신이 만든 컵받침을 나눠주며 “내가 만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녀는 한 장의 종이가 주는 즐거움에 완전히 매료돼버렸다.
“무언가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그녀는 종이접기는 완전히 즐기고 있었다.

민 대표는 2001년과 2007년에 옥천군으로부터 봉사활동 관련 감사패를 수여받았다.
민 대표는 2001년과 2007년에 옥천군으로부터 봉사활동 관련 감사패를 수여받았다.

작은것들이 주는 행복에
10가지 공예 섭렵

젊은 세대가 쓰는 신조어 중 ‘소확행’이라는 말이 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이다. 작은 것에서 만족감을 얻고 행복해하자는 삶의 의미도 담겨있다.
민 대표가 느낀 행복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아기자기한 공예품이 주는 시각적 심미와 한 작품 만드는 과정을 마스터 하기까지의 노력, 완성된 작품을 보고 느끼는 보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렇게 종이접기에서 시작해 종이접기와 함께 적용해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리본공예, 펠트공예 등도 섭렵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가 다루는 공예의 종류는 10가지가 됐다. 종이접기, 리본공예, 펠트공예, 냅킨공예, 종이조각, 골판지공예, 팬시우드, 선물포장 등.
그래서 ‘종이사랑갤러리’에는 민 대표의 손 끝에서 피어난 다양한 종류의 작품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종이접기로 자원봉사도 해

옥천도서관에서 종이접기 강좌를 수강한지 3개월차, 강사님이 “자격증 있는데 한 번 도전 하실분 계신가요?”라는 물음을 날렸다. 한창 종이접기에 즐거움을 느끼던 민 대표가 나섰다.
자격증 과정을 시작하기로 마음 먹은 민 대표는 당시 거주하던 오동리 부녀회장과 얘기를 나눈 후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자격증까지 도전할만큼 재밌었던 종이접기가 홀로 지내는 어르신이나 어린 아이를 키우는 주부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수강생’에서 강사로, 작가로 점점 커리어를 쌓으며 민예총에 가입해 지용제, 포도축제, 어린이날 행사 등에서 체험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부스 체험 당시 유봉렬 전 군수와의 만남을 회상하던 민 대표는 “종이접기에 대해 피력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다보니 종이의 역사부터 설명하게 됐다”며 “30분이 넘도록 서서 설명을 들으신 유 전 군수께서 보건소를 통해 관련 강좌를 만들어 주셔서 너무 감사했다”고 했다.
손가락 등 소근육을 전부 사용하고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종이접기가 보건소에 다니는 정신지체장애인,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몇 해 전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 단체를 통해 필리핀에 해외봉사를 갔을때도 종이접기를 가르쳤다.
자연 그대로의 상태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오지의 학교에서 책상도 없이 손짓발짓으로 가르쳤지만 한 동작이라도 놓칠까 자신의 손만 바라보고 있는 수십여개의 눈망울에 오히려 감동을 받았다는 그녀. 이런 그녀의 체험기는 단체의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민 대표가 몇 주간 걸쳐 시골의 정취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작품.
민 대표가 몇 주간 걸쳐 시골의 정취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작품.

 

갤러리 운영과 새로운 도전 

처음엔 지인들의 초등학생 아이들만 알음알음 가르치던 종이접기가 자원봉사와 작품활동, 강사활동을 통해 더욱 유명해지게 됐다. “그 선생님 꼼꼼하게 잘 봐주신대요”, “애들 집중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아요”라는 소문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돌며 점점 힘을 얻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이들을 가르쳐야하기 때문에 아동심리, 보육교사, 인성지도사 등 아동 교육 분야의 다양한 자격증을 섭렵해 체계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특히 수학‧미술‧과학 등을 연결해 아이들이 마치 놀이처럼 부담없이 원리에 접근하게 했다.
민 대표는 초기 각 가정을 방문하며 가르치다 정식으로 갤러리 겸 한국종이접기협회옥천지부를 설립했다. 상가에서 다른 상가로 한 번의 이사가 있었지만 십수년 간 갤러리에서 유아부터 성인까지 가르치며 만족할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난 해 코로나 19가 불어닥치며 갤러리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렇다고 민 대표가 갤러리 운영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현재 거주중인 집으로 공간을 옮기고 작품의 수를 많이 줄였을 뿐 여전히 아이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종이접기를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민 대표의 가슴 한 구석엔 어쩔도리 없는 상실감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새로운 도전은 바로 몇 해 전부터 열풍이 불고 있는 ‘유튜브 크리에이터’. 영상은 지난 9월부터 올리기 시작했지만 마음으로는 몇 해 전부터 해보고 싶었다는 그녀. ‘멋지게 시작해야지’라는 생각에 망설였지만 가족 모임에서 조카들이 추천해줘 시작하게 됐다. 7살 때부터 7년간 종이접기를 해온 제자의 도움을 통해.
청년층이 하는 것처럼 영상에 화려한 자막을 달거나 웃긴 썸네일은 없지만 구도를 잡는 것부터 촬영, 핸드폰 어플을 이용한 간단한 편집을 통해 그녀의 유튜브 채널 ‘샘미니’에 매주 1편씩 종이접기 영상을 올리고 있다. 50만명, 100만명을 가진 구독자처럼 폭발적인 반응은 없지만 조금씩 구독자와 조회수가 느는 걸 보는 재미도 크다. “우와, 크리에이터가 내 눈앞에 있네”라는 아이들의 찬사는 덤이다.
민 대표는 “코로나로 아이들을 데리고 야외 활동을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준비하게 됐다”며 “부모님과 아이들이 함께 영상을 보고 종이를 접으며 유대감이 자라길 바란다”고 했다.
누군가는 종이를 보며 구겨 휴지통에 넣기 바쁘지만 또 누군가는 종이의 모양, 색깔, 질감까지 자세히 관찰해 작품을 빚어낸다.
민 대표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격과 특성을 잘 파악해 아이들이 진정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진로를 잡아주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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