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지만 올곧은 심성을 가졌던 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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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올곧은 심성을 가졌던 유학자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3.18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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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옹 송갑조 선생
수옹 송갑조 선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시행하는 선비의 자세를 보여줬다.
수옹 송갑조 선생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끝까지 시행하는 선비의 자세를 보여줬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이름을 많이 올린 유학자는 누굴까? 바로 우암 송시열 선생이다.

인조 14년에 처음 실록에 등장한 선생은 철종 대까지 총 2,625번 직접 이름을 올렸으며 우암을 지칭하는 다른 대명사까지 포함시키면 3천번이 넘을것이라 추정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중후반, 약 15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큰 영향력을 미친 우암 송시열을 기르고 교육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가치관을 가졌을지 궁금해질법도 하다.

수옹 송갑조 선생은 1574년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형편에 불평하는 대신 열과 성을 다해 부모를 모시고 정도(正道)를 지키며 산 선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수려할 뿐만 아니라 살이 희고 음성이 또렷해 부모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어릴적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의 노비였던 현비에 의해 길러졌는데 당시 신분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유모 현비를 깍듯하게 모시고 현비가 양인과 결혼해 낳은 아들도 형제처럼 여겨 극진히 살폈다고 한다.

수옹은 6살에 김근공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올바랐던 그의 행실 덕분에 스승 김근공을 비롯한 다른 유학자에게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수옹은 11살 때 큰 아픔을 겪는다. 어릴적 친어머니를 여의었던 그가 아버지마저 잃게 된 것.

이후 그는 최립을 통해 수학하게 되는데 수학 도중 임진왜란이 일어나 피난을 가게 된다.

피난 중 그는 전염병에 걸린 형에게 거리낌없이 다가가 형이 원하는 음식을 구해다 주기도 했으며 또 다른 형 송승조가 옥천에서 왜병에게 피살당하자 왜군이 가득 차 있음에도 그 장소로 달려갔다.

이처럼 가족간의 효와 예절을 중시하던 수옹은 이후 광해군 대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다.

이 때는 인목대비를 폐위하려 그녀를 서궁에 가뒀을 때인데 모두의 만류와 반대파의 협박을 제치고 비밀리에 서궁을 방문해 인목대비를 혼자 배알하고 돌아왔다.

그는 죄인인 폐비를 만났다는 이유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함께 자랐던 친구 박태길의 형 박정길이 힘을 써 조선시대 유생의 학업 등을 기록한 문부인 유적에서 삭제되는 데 그쳤다.

그 후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해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공자, 주자, 이이, 성혼들의 도서를 탐구하고 학숙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 당시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그의 형편이 심지어 싸라기 죽도 먹기 어려울 정도로 더욱 어려워졌지만 그는 항상 마음 가는대로 즐겁게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인조반정이 성공해 인조가 집권하자 그는 강릉참봉에 특별 제수돼 상경했으며 이듬해 이괄이 난을 일으켰을 때 함께 일하던 사람들 중 장정 30명을 추려 도보로 공주까지 가 인조를 호종했다.

1627년 청나라의 침입으로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를 만나 호종했으며 이후 인조의 삼배구고두 소식을 듣고 격분하며 사직서를 제출, 낙향해 시문과 독서에 집중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이듬해에 옥천에서 사망했다.

그가 가졌던 신념에 대한 자신감, 자신을 돌봐준 사람에 대해선 신분을 막론하고 대접하는 의리, 자신이 행하고자 한 바를 위해 주변의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아 하는 대쪽같은 성격은 그의 아들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그대로 전달됐으며 옥천군민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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