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 송근수 선생은 어릴적부터 주변 친구들과 잘 어울려 주변에서 “원대한 그릇을 가진 아이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으며 학문을 익힐 때 스승이 가르치지 않더라고 스스로 학문을 익혔다고 전해진다.
그는 8살에 당시 이미 작고한 종가 송흠락 선생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양부와 양모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김과 동시에 큰어머니인 경주 이씨를 섬기는데 열과 성을 다했다고 한다.
경주 이씨 또한 입재의 효성에 감탄해 그를 친자식과 같이 대했다.
그가 입적됐을 때 양부의 서자가 있었으나 당시 적자가 대를 잇는 법도에 따라 양자로 들어가 형과의 갈등이 있었다.
어렸던 입재는 이를 억울히 여길 수도 있었지만 지혜롭게 극복하고 형과 의롭게 살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양자로 간 후에도 매일 생부를 방문해 인사를 올렸다.
입재는 1848년에 원릉참봉을 지냈고 그해 5월에 중광문과의 병과 21위로 급제했다. 입재가 우암 송시열 선생 집안의 자손인 것을 알아본 헌종이 “우암 자손 집안에 이런 인재가 있으니 정말로 기쁘다”는 특교를 하사하고 홍문관 부수찬에 임명했으나 입재는 이를 사양하며 오로지 성학에만 힘쓸 것을 상소했다.
입재는 1852년에 동부승지에 임명, 이후 이조참의, 우부승지를 역임한 후 다시 이조참의가 된다.
이때 조석우가 조부 조하망의 문집을 냈는데 문집 속 내용 중 하나가 우암 송시열 선생과 효종을 헐뜯는 내용이어서 조정 여론이 시끄러워지자 글을 올려 사직했다.
하지만 1855년 좌부승지로 옮기고 겨울엔 경주부윤을 제수받았다.
입재는 경주부윤직을 지내며 청렴결백하게 공무를 집행했고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억울한 사형수의 옥살이를 살펴 방면하는 등 백성을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백성을 살폈던 입재는 좌부승지, 우부승지, 의금부도사, 예조참판 등에 오르며 정치적으로 승승가도를 달렸지만 1858년 12월 스승이자 맏형인 송달수가 타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다시금 이조참판이 됐고 성균관대사성, 형조판서, 판의금으로 자리를 옮겼다.
1864년 자신을 알뜰히 살펴준 철종이 타계하자 고종의 명을 받아 철종의 능지를 지어 올렸고 9월에 의정부우참찬, 한성판윤, 사헌부대사헌, 지중추부사 등에 연이어 역임되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이후 임진왜란 때 원군을 파견한 명나라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가 철폐된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는 화양동에 들어가 통곡하고 들어왔다.
이후 그는 숭정대부,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 이조판서를 제수받았으나 만동묘철폐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와 함께 이조판서 제수를 거절했다.
고종은 “경은 사양하지 말고 즉시 명을 받들 것이다”고 하며 약방사역제조에 임명했다.
이후 판의금부사, 홍문관제학, 형조판서 등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라간 입재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해 옥천에 돌아오길 원하며 사직소를 올렸다.
하지만 이는 반려됐고 이후 여러차례 사직을 청하지만 계속해서 반려돼 말년엔 옥천에서 생활하면서 나라에서 부름을 받으면 부득이 벼슬길에 나아가길 반복하다 1903년 85세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