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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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야 미안하다!
  • 동탄 이흥주 수필가
  • 승인 2021.04.01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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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기가 들면 여지없이 찾아오는 게 있다.

한잔의 생각이다. 점심때나 저녁시간에 그렇다.

술도 속이 비어 출출할 때 생각이 난다.

낮술에 취하면 어른도 몰라본다는 우스개가 있지만 나야 뭐 내가 어른? 이니 누구 몰라보고 할 것도 없다.

지체없이 점심밥상머리에서나 저녁밥상에 소주병이 대령한다.

이때 한 잔 하는 맛은 그야말로 사는 낙이 이런 거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움 바로 그것이다.

아, 소주야 고맙다! 네가 없으면 무슨 맛으로 세상사냐.

내가 매일 집에서 소주와 놀 수 있음은 이제 황혼 길에 자유스러움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월급 받을 때 낮술을 하면 당장 집에 와서 애나 보아야 할 것이다.

노년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좋은 점을 열거하자면 굉장히 많다.

우선 공짜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독감접종이 공짜요 또 무슨 무슨 예방접종이 공짜요, 지하철이 공짜(탈일도 별로 없지만)등등 공짜가 많아진다.

늙은이를 폄하하는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에서 어르신 대우를 받는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유의 몸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눈치 볼 곳이 없다.

나에겐 가장 좋은 것이 사랑하는 소주를 낮에도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자유가 어디 있겠는가.

실은 많이는 안 마신다.

그냥 즐긴다.

하루 소주 반 병.

기분이 넘치면 한 병까지 가기도 하지만 아주 드물다.

이거면 금방 세상이 낙원이 된다.

돈으로 따지면 반병 650원 정도, 안주 값은 집에서 마시니 없고. 참 싸다 기분 좋아지는 음식 치고는.

술 예찬을 하다 보니 내가 엄청 큰 술꾼이라도 되는 성 싶지만 젊어서 한 자리 소주 두세 병 마시는 정도였다.

때로 그 이상이 될 때도 많았지만 자세는 끝까지 꼿꼿하게 유지했다.

술을 좋아해서 어울리면 밥과 안주는 남기고 와도 술 남기고는 못 왔다.

이제 나이 드니 어울려 술 먹을 사람도 없거니와 몸이 많이 허용하지를 않는다.

일부러 술자리를 피한다.

술자리에 앉으면 지금도 술 욕심을 억제하기가 힘들다.

나이가 내 건강 챙길 때가 됐다.

그래서 혼자 밥 먹으며 하루 반주(飯酒) 반병이 주량이다.

소주잔으로 3, 4잔, 어찌 보면 대단한 애주가다.

우리 집에는 소주박스가 항상 놓여있다.

짝 떼기로 사다 놓는다.

한 짝에 20병이니 40일이 즐겁다.

참 쉽다 즐거워지는 방법도.

아마 나이 들면 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 같은 이유로.

적당히 마시는 술은 건강에 좋다는 사람도 있고 조금 먹는 술도 해롭다는 사람도 많다.

어느 것이 맞는지 나는 모른다.

그냥 맛있으니까 먹는다.

내가 먹고 남에게 피해 안주며 나 즐거우면 술 마시는 걸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게 그렇거니와 적당이가 힘들다.

아무리 좋은 음식도 과용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맛있는 것일수록 적당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단것이 그렇고 커피 등 기호식품도 도를 넘기기가 쉽다.

커피 역시 몸에 좋다 나쁘다 논란이 많은 것 중 하나다.

요즘 넘치는 게 커피숍이니 커피예찬도 많을 것이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가름이 확실치 않을 때 지켜야 하는 것이 이 ‘적당하게’란 말이다.

적당이라는 것은 음식뿐 아니라 우리 생활 전반에 해당되는 말이다.

모든 것이 넘쳐서 좋을 건 없다.

나도 커피를 좋아하지만 하루에 두 잔을 안 넘긴다.

이 커피 역시 식사 후 한 잔이 나를 즐겁게 하는 음식이다.

한데 솔직하게 말해서 넘쳐봤으면 하는 게 있다.

바로 ‘돈’이다.

돈이 넘치면 얼마나 좋을까.

제일 좋은 차에 매일 놀러나 다니고 외국여행이나 다니고 자식들까지 편하게 살게 할 테니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이거 밝히다 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복권에 당첨돼 갑자기 돈이 넘치는 사람이 불행해졌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돈에도 ‘적당’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고 싶다.

어느 만큼이 적당일까.

나와 내 자식들이 하루하루 사는데 크게 부족함이 없는 정도가 가장 좋은 것이다.

지금 이것이 부족해 힘들긴 하지만 불평은 하지 말아야겠다.

돈도 좋지만 내 가족에 건강이 넘치길 기원한다.

어제 봄철마다 나를 괴롭히는 비염 때문에 서울에 있는 병원엘 갔다.

6,7년 전인가 나를 치료한 의사를 한 달 넘게 기다려서 찾아갔다.

그 의사에게 환자가 몰리니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우리나라 유수의 대형병원에 근무하다가 지금은 큰 이비인후과병원을 한다.

전국으로 이름난 이비인후과 명의다.

술을 하루에 반병씩 마신다고 했더니 그러면 앞으로 자기를 찾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앞뒤 안 가리고 술을 끊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한평생을 사랑한 나의 소주와 작별하겠다고 선뜻 약속을 해버리고 말았으니…

사람이 누구와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많은 회포가 흐른다.

한 평생을 애주(愛酒)로 살았는데 작별을 그리 쉽게 선언해버리다니…

인생후반기에도 내가 가장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소주인데! 앞으로 네가 생각날 때 다시 너에게 달려가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나도 나를 모르겠다.

소주야 정말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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