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자연(無爲自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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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無爲自然)
  • 곽봉호 군의원
  • 승인 2021.04.0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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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자연(無爲自然)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자연을 따라 만사형통해지는 그대로의 자연이다.

이를 확대하면 꾸밈없이 자연의 순리(順理)에 따라 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장자(莊子, BC 369~BC 289)는 “만물은 다 제각각 고유의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된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감각과 주관대로 무엇을 판단하거나 결정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외부의 자극이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을 비우는 좌망(坐忘)과 심재(心齋)를 통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곧 지인(至人), 신인(神人), 진인(眞人)으로 명명되는 이상적인 인간이다”라고 했다.

“세상에 규제와 법령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사람의 기술이 발달할수록 해로운 물건이 더 많아지고 법이 많이 만들어질수록 도둑은 더욱 늘어난다. 자연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것이 최고의 인지이며 그 자연의 도에 내 몸을 고스란히 맡기는 것이 지인(至人)이 되는 첩경(捷徑), 인간의 본성과 자연의 본성,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무위자연의 천국은 무릉도원의 이상향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유롭고 행복한 것이다. 무위자연의 천국으로 가는 데는 돈, 명예와 권력 등의 외물(外物)이 장애가 된다. 외물은 대단한 자아를 구축하고 쾌락과 욕망을 자극하여 욕망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고 노자는 말했다.

눈으로 보이는 너머의 본질을 보라고 가르치는 플라톤(Platon)의 이데아( Idea) 사상이나, 노장사상에서 무위자연 사상이나, 스스로 그러하도록 살아라(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고 열창한 비틀즈(Beatles)의 노래나 다 본질을 꿰뚫어 진실에 이르라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대도(大道)는 이름을 붙일 수 없고 진정한 변론은 말로써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 위대한 사랑은 그 표현이 무심하고 위대한 청렴은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대한 용기는 남을 해치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뽐내고 자가가 명철하게 사물을 보고 있는 줄 알고 어떤 것은 높다고 추켜 세우고 어떤 것은 천하다고 업신여기니 얼마나 고루(孤陋)한 짓인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38장에 “가장 훌륭한 덕은 덕이라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있다. 수준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덕이 없게 된다. 가장 훌륭한 덕은 무위하면서 무엇을 위하여 함이 없다.”고 했고, 도덕경 51장에서는 “무엇을 낳고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무엇을 하고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으며 무엇을 길러 주고도 그것을 주재하려 들지 않는다”고 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무책임,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으로 바다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나의 생각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에 관심을 가지라는 말이다.

나만 옳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옳고 나도 옳으니 우리 서로를 존중하면서 살자는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너도 좋고 나도 좋다.

그렇게 다름을 아름답게 보고 행복하게 살자는 말이다.

나의 생각이 맞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도 내 생각처럼 소중히 대해주자는 말이다. (이원섭 역 ‘노자’에서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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