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가 필요한 재일조선인은 내게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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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가 필요한 재일조선인은 내게로 오세요”
  • 김수연기자
  • 승인 2021.04.08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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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충 의학박사
정구충 선생은 다방면에 걸친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해 월남장, 과학기술상 등을 수상했다.
정구충 선생은 다방면에 걸친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해 월남장, 과학기술상 등을 수상했다.

 

1년 넘게 지속돼온 코로나 19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했지만 이를 통해 우리 주변의 의료인이 사람의 생명에 원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 100년 전에도 의사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옥천 출신의 정구충 의학박사다.

1895년 옥천군 군북면 소정리에서 태어난 정 선생은 익산군수를 지냈던 할아버지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김해군수를 지낸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

그는 9살 되던 해 아버지가 계시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서울에서 계산학교를 졸업하고 한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을 마치고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오사카로 유학을 떠났다.

의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정 선생은 1921년 오사카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사카의과대학부속병원에서 외과의로서의 수련을 마쳤다.

수련을 마친 후 귀국한 선생은 1923년 경상북도 안동도립병원 외과과장, 1925년 황해도 해주도립병원 외과과장, 1927년 평안북도 초산도립병원 외과과장 등을 역임했으며 1928년 다시 오사카로 건너가 오사카의과대학의 결핵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30년 1월, 그는 일본에 오사카조선무산자진료소를 설립한다.

오사카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위한 의료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오사카조선무산자진료소는 오사카에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이 언어가 통하는 조선의사에게 치료받기 위해 만든 기관으로 정 선생 등을 중심으로 30여명의 후원회를 조직해 진료소 개설을 목표로 삼았다.

실비진료소는 개업 당일부터 60여명이 몰릴 만큼 성황을 이뤘는데 이는 반대로 그동안 오사카에 거주하던 많은 조선인이 언어장벽, 차별 등을 이유로 제 때 병원에 가지 못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 선생이 이들의 동아줄이 되어준 것이다.

생명을 살리기 위한 정 선생의 노력에는 그의 아픔이 숨어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첫 번째 부인과 결혼했으나 결혼 1년만에 사별했으며 이후 재혼했지만 두 번째 부인과도 사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의 큰 형, 정구창 선생 또한 이른 나이인 30대 초반에 타계한 까닭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슬픔을 진료에 녹여냈음이 틀림 없다.

자신의 환자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이별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비진료소 운영은 오래가지 못했다.

1년 6개월이 조금 넘는 시점에서 분원 개원을 예정하고 있었는데 단체설립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해 일경의 폐쇄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폐쇄명령 후 간부들은 대책위원회와 확대위원회를 통해 폐쇄를 결정하고 ‘일본무산자의료동맹 지도 아래 분원을 설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 선생은 대내외적으로 혼란한 와중에도 1932년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3년 귀국해 서울에서 외과의원 개원을 시작으로 수십년간 국내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외과교수로 부임했으며 초대 교장을 맡아 전문학교에서 대학으로 발전시켰다.

1940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서울여자의과대학 전환을 위해 일본인을 교장으로 앉힌다는 인가 조건을 허용하고 인가에 성공했으며 광복 후 다시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어 조선외과학회, 경기고등학교 총동창회, 충북도민회 등 다양한 단체조직에 참여했으며 왕성한 사회활동을 마치고 1986년 91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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