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운동 순국자 김철수
상태바
독립 운동 순국자 김철수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4.29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산 만세 운동에서 순국한 김철수 선열의 손자 김영중 씨.
청산 만세 운동에서 순국한 김철수 선열의 손자 김영중 씨.

 

김철수 선열은 1878년 9월 9일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시기 청산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 헌병의 총칼에 순국하면서 후세에 독립운동가로 알려지게 된다.

1919년 4월 3일 밤 8시경 수천 명의 시위군중이 청산면 주재소 주위에 모여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자 현장에서 5명이 순국했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

청산 만세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청산면에 거주하던 5~6호의 일본인 가족들은 헌병주재소로 도피했고 주재소 내 헌병은 엎드려서 계속 발포했다. 김철수 선열은 이때 순국했다.

상예곡리 만세운동의 주역

김철수 선열은 청산면 지역에서 만세 운동을 했던 상예곡리 만세 운동의 주역이었다.

특히 국가보훈청의 공식적인 인정에 의하면 청산 만세 운동 당시 순국자가 나온 곳은 상예곡리가 유일하다.

수형인명부 기록에 따르면 상예곡리 만세 운동의 주역으로 네 명이 꼽힌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김철수, 그다음이 김지수, 김인수, 최남석 지사 순이다.

이들은 살던 집이 바로 이웃이었다.

김철수 순국선열이 살던 집 울안에 최남석 지사가 살고 있었고 김인수, 김지수 지사의 집이 연달아 붙어 있었다.

이는 아직도 청산면 상예곡리에 살고 있는 김철수 순국선열의 손자 김영중(82)씨가 옛 집터를 안내했다.

증언에 따르면 상예곡리의 만세 운동 주역이면서도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지도부를 형성했던 인물 중 하나가 김철수였다.

헌병들이 청산 장터에 울려 퍼지는 만세 시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김철수 선열 역시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군중들을 일단 해산시키는 한편 자신은 주위에 숨어 있다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미리 준비한 짚단을 이용해 헌병분견소 추녀에 불을 붙이는 순간 헌병에게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기에 이르렀다.

순국 후 후손들의 삶

김철수 선열의 며느리인 양순분 씨는 “시아버님이 청산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돌아가실 때 남편(고 김용묵 씨)은 다섯 살이었고 위로 시누이가 있었는데 아홉 살이었어요. 막내 시동생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었어요”라며 “시어머니는 어린 세 남매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겠어요”라고 말했다.

며느리 양 씨가 기억하는 것은 시집와서 2년이 지나도록 남의 집에서 구걸해서 먹고 살았던 일이다.

멀리는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나 세중리까지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다 먹었다는 것이 양 씨의 증언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 씨의 남편인 김용묵 씨 또한 결혼한 지 7년만인 1937년 도로를 내는 부역에 강제로 나갔다가 절개지가 무너지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김철수 선열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손자 김영중 씨가 고등학생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독립유공자 포상이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그걸 보고는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인우보증까지 세워서 포상 신청을 했지만 매번 떨어졌다. 그래서 김 씨는 청와대로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1962년 충북에서 발간한 작은 책자에 독립운동 유공자에 대한 표창을 한 기억이 나 그걸 자료로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을 수 있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