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맥우식당 위치에 호국공원화 모색됐었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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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맥우식당 위치에 호국공원화 모색됐었다”②
  • 천성남국장
  • 승인 2016.07.0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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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간 은폐돼 오다 비로소 백동호의 동명소설로 영화화된 ‘실미도’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충격 실화 실미도 사건의 끝나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재조명한다. 지난달 24일 본사를 찾아온 2명의 유족들로부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1968년 3월, 옥천지역에서 한꺼번에 행방불명됐던 7명의 청년 중 한 사람이었던 이광용(당시 일일노동자)의 동생 이경주(59·옥천 장야리)씨와 대전 한밭체육관 권투선수였던 이명구의 동생 이명철(59)씨다. 이들 유족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혈육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동분서주 했던 처절했던 체험담을 꺼내놓으며 타들어가는 듯 입술을 적셨다. 본란은 국방부진상조사보고서, 유족 증언을 바탕으로 10회 연재된다.                    〈편집자주〉
 

대전 한밭체육관 출신인 이명구의 동생인 유족 이명철(59)씨는 “현재 21명의 유해가 3군수지원사령부 보급대대 창고에 보관 중이다. 당시 유족들이 하나, 둘 돌아가시고 유해를 당시 국회의원이셨던 이용희의원의 재량으로 공군본부와 유족회가 현 맥우식당(식당 들어서기 이전) 옆 국유지에 공원화하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지금은 흐지부지된 상황”이라며 “매년 8월23일이 돌아오면 제사를 지내러 가고 있다. 국방부에서 작년 연말(2015년 12월)까지 유족들에게 호국원 비슷한 건물을 지어서 해주겠다는 약속했으나 올해 6월6일 만나자고 했으나 외국출장 중이라며 연락조차오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1968년 당시, 한국정부의 수뇌부는 북한무장 특수부대가 청와대까지 급습한 목표가 대통령 암살이라고 규정하고, 이에 강경 대응하는 것만이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각 군에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북한의 김일성 거처를 습격할 목표를 지닌 특수부대 창설을 특수공작지시를 문서를 통해 하달했고, 공군은 실미도 부대의 훈련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 무력을 통한 즉각적인 보복을 주장하는 한국수뇌부의 움직임과는 달리 미국은 북한과의 직접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 방향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당시 베트남전에 대한 반전 여론이 비등하였던 미국 내의 여론은 북한의 보복을 군사충돌로 확전되어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볼 때 한국정부의 독자적인 무력보복 계획은 실현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군2325부대의 정보 및 보안업무에 대해 상시적인 조정·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던 중앙정보부는 1.21사태 직후에 ‘특수공작지시’를 하달해 특수부대 창설을 기획·조정·감독했다.

모집관들은 민간인을 접촉, 회유하는 과정에서 특수훈련의 위험성과 북파침투로 인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충분히 고지하기 않았으며, 이들을 민간인 신분으로 채용하였고 그 채용조건에 대해서도 사실상 이해하기 어려운 사항들을 포함하여 과장된 조건을 약속하였다.

더구나 교도소 중형선고 자를 1차로 선정했다가 철회하고 일부 전과자 출신 등의 민간 청년들을 최종 선정한 이유가 사회로부터 장기간 격리시켜도 가족이 찾지 않을것에 착안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정권의 국민에 대한 인명경시 풍조 및 도덕 불감증의 사례로 판단된다.

■ 684부대 교육훈련
31명의 공작원들에 대한 훈련목표는 북한 124군을 능가하는 기량을 갖추는 것으로 북한에 침투하여 공장 임무 수행시 체포되면 수류탄을 입에 물고 자폭하는 것이었으며(실미도사건 진상조사TF, 2005.8.9.)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훈련성과가 향상되지 않으면 가혹하게 처벌하였고 이를 위해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였는데 6개월의 훈련결과, 공작원들은 6㎞를 124구보다 1분빠른 26분에 완주하게 되었다.김○○, 위원회 면담조사, (2005.9.22.)

■ 교육내용
최초 12주간 교육과목은 총14과목, 이른 138시간 훈련 390시간 총 520시간을 계획하여 이론 및 실습 병행하였고, 실미도기지에서는 이론 및 일반훈련, 인접 대무의도에서는 특수산악훈련(사격150시간, 종합훈련 63기간, 호신술(인민군제식훈련) 62시간, 폭파44시간, 산악훈련 48시간, 지휘 및 기습작전 40시간, 정찰 28시간, 독도법 25시간, 침투훈련 24시간, 장애물돌파 16시감, 게릴라전술 3시간, 구급법 5시간, 지역연구 10시간, 북한실정 10시간) 등이다.

1971년에는 △기구 및 낙하산 훈련 △해상침투 훈련을 위한 장거리 보트훈련 △모의 공작목표를 제작, 교육하여 공격목표 완전 숙지 △종합 훈련 실시 △북한 중요 공작목표 5개를 새로 연구(공군2325부대, 연간 사업계획서 제출 공작비 제1호2-212(1971.3)

이러한 교육 훈련을 실시한 결과, 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은 시간당 10㎞이상의 산악을 주파할 수 있었고(해상침투 시간당 5㎞, 1.2㎞ 장애물 돌파 15분내), 명중률 98%이상의 사격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태권도 호신술도 숙련 되었고, 기구 및 낙하산 훈련을 이수함으로써 공중침투도 가능하게 되었다.(국방부 군특명검열단, ‘군특수범난동사건조사보고서’1971.8.30)

■ 훈련기간 중 부상 및 가혹행위
김창구(재판기록2권, 도강훈련 중 다리를 다쳐 미8군 에스콤병원에서 치료 후 1968.7.10.퇴원)와 이서처이 외줄타기 훈련 중 기간총 탄환에 옆구리 관통상(김○○은 위원회 면담조사(2006.4.27.)에서 조준사격 아닌 유탄이 바위에 맞았다가 스친 것이라 진술) 등 강도 높은 훈련으로 잦는 부상 발생했고, 김병염(충북옥천)은 1971년 초 소대장 김○○에게 기합 받을 때 폭행으로 고막이 터져 미8군121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았다.(재판기록2권)

제식 훈련 시 구타는 A조소대장 도○○에 의해서 이뤄졌으며(김○○는 위원회 면담조사에서(2005.9.22.) 자신이 한국일보(2004.1.12.)와의 인터뷰에서 “제식훈련도 북한식으로 이루어졌다.

틀리면 미군 야전 침대목을 뽑아 만든 몽둥이가 사정없이 머리로 날아갔다. 워낙 단단한 목질이어서 맞으면 그대로 피를 뿜으며 거꾸러졌다”는 내용과 관련하여 A조 소대장 도○○에 의해 구타가 이뤄졌다고 증언하였다.) B조소대장 김○○는 훈련 성적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공작원 전균을 바닷가에 끌고가 물속에 10여분간 집어넣고 밟았으며(김○○는 위원회 면담조사에서(2005.9.22.) 자신이 한국일보(2004.1.12.)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리해도 진전이 더딘 C가 있었다. 전체를 위해 제거하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저녁때 해안으로 끌고나가 물 속에 집어넣고 밟았다. 10분이 지났는데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다시 백사장에 묻었다. ‘내일 아침 점호때까지 죽지 않았으면 살려줘라’ C는 그렇게 살아났다”고 한 것과 관련하여 사실을 인정하였다.) 전 공작원이 훈련을 잘못 받을 때는 기합을 받았는데 으레 기합을 받을 때는 몽둥이찜질과 주먹질, 발길질 등을 당하여 공작원들은 거의 다 골병이 들었다고 생존공작원이던 김병염은 수사과정에서 진술하였다.(재판기록2권)
 

〈다음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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