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선도자 ‘조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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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선도자 ‘조준홍’
  • 오현구기자
  • 승인 2021.05.0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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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홍 선생
조준홍 선생

 

조준홍 선생은 1904년 3월 4일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에서 태어나 1970년 2월 2일 옥천읍 금구리에서 향년 66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문맹 퇴치 운동과 향토교육

1924년 대전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옥천군청에서 근무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석탄리에서 천막을 치고 학교를 못 다닌 젊은 청년들에게 야학을 통해 공부를 가르쳤으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송재명 선생과 야학을 계속했다.

해방 이후에도 조준홍 선생의 문맹 퇴치 운동은 계속돼 송재명 선생과 함께 옥천읍 수북리 일대에서 천막을 치고 아이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설립했다. 동이면 남곡리, 석탄리, 옥천읍 수북리 일대 아이들이 일제히 모여 들었다. 그렇게 문맹 퇴치 운동을 했고 이것에 감화한 제자들은 수몰되기 전 수북리 마을 입구에 조준홍 선생과 송재명 선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조준홍 선생의 아들 조길현(74) 씨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옥천중학교 설립추진위원으로 있을 때 옥천중학교 설립 예정지 내 있는 약 3,300㎡ 넓이의 땅을 옥천중학교 설립용지로 모두 기부했다. 선생이 그만큼 향토교육에 애정이 많았다는 얘기다.

해방 이후에는 물산 회사를 운영하면서 옥천읍 신기리에 큰 집을 지어 지역을 재건하는 데도 앞장섰다. 복식부기 등 회계에 눈이 밝았으며 지역에서 드물게 대전 상고를 졸업하고 물산 회사를 차려 옥천읍 내 소문난 부자로 살면서도 지역 교육에 애정을 갖고 옥천을 살기 좋은 지역으로 만들고자 정치에 투신하기도 했다.

초대(初代) 옥천읍 의원

1952년 4월 25일 처음 실행된 지방자치 선거에서 조준홍 선생은 옥천읍 13명의 의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됐고 1956년 열린 지방선거에는 옥천읍 의원으로 재선돼 부의장을 지냈다. 1960년 지방선거에는 3선 의원으로 의장을 역임했다.

옥천중 12회 졸업생인 조길현 씨는 “아버지가 젊었을 때는 지역 교육 현장과 정치에서 온 힘을 다해 애쓰셨으나 말년에는 재산이 없어 힘들게 생을 마감했다”며 “아버지의 이런 마음과 정신만큼은 지역에서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를 알리게 됐다”고 했다. 옥천중학교 60년 사(史)에는 이 같은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옥천중학교는 1951년 옥천농고에서 분리, 3년제 6학급 중학교로 신설됐고 1952년 5월 16일 옥천군 내 중학교 건축을 위해 중등교육 후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에는 군수가 선임돼 군내 거주 8,320 가구주를 회원으로 하고 회비는 잡곡 다섯 되를 갹출키로 약정했다고 나올 뿐 조준홍 선생의 땅 희사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향토교육에 애정이 많았다. 그는 ‘의식 있는’ 지역 유지였다.

1970년대 물산회사를 농협이 불하받게 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10남매는 어렵게 컸다는 것이 조길현 씨의 말이다.

특히 조준홍 선생은 옥천읍 내 초, 중, 고 육성회장을 다수 역임하면서 지역 교육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옥천군 체육회 부회장을 수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8년 정부 수립 이전까지의 무정부 시기, 자치 치안대장을 역임하면서 바른 치안 유지에도 힘을 쏟았다. 옥천의 최초 의원인 삼산의원 이헌영 원장이 적색분자로 오인돼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치안대장의 임무를 잘 수행해 누명을 벗겨줬다. 그 이후부터 병원비를 면제해주는 혜택을 받았다는 가족의 증언이다. 수상으로는 문교부장관상과 충청북도교육감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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